사람이 태어날때도 각자의 울음소리가 틀리고 부모가 가진것에 따라 아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듯이 죽음에도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분들이 사망을 했지만 장례절차는 각자의 처한 환경과 사정에 따라 나눠지는 것 같다.
천주교 신자여서 천주교식으로 입관식을 치르면서 다른 분들은 불교신자인 분은 불교식으로 치를 것이고 교회신자인 분은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를 것이라 생각하니 죽음을 비슷한 시기에 하고도 각자의 길로 간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가족의 품에 돌아온 그들이 이제 아주 먼길을 떠날거라고 생각하니 입관식에 대기실에서 들려오던 미망인과 자녀들의 한숨과 울음소리가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미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때 천주교 신자여서 무의식 중에따라하게 되는 천주교의 의식과 찬송가가 찬송가 책을 보지 않고 머리에서 입으로 그냥 튀어나오는데 어느덧 반백이 넘어 갑자기 침침해진 눈으로 의식을 하기 위한 책의 페이지도 보이지 않았다.
제단앞에 촛불을 들고서 서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고인에게 꽃을 바치며 찬송하고 관 안에 고인의 모습이 평소와 왜 그리 달랐던지 하마터면 말을 걸 뻔했다.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세요 라고.
자는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어 몇번 개인적으로 얘기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정을 땐다고 할까 아뭇튼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서 아주 잠깐의 마지막 만남이지만 편안히 쉬시라고 기도하고 미망인과 자녀들이 서서 맞이하는 그 순간 무슨말을 해야할지 머리는 텅 비고 입은 꿀을 먹은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을 보듯 그냥 그렇게 쳐다볼밖에.
밖으로 나와서 교인들이 대부분인 그 장소에 우리 산우회와 사고 현장을 함께 한 분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고인의 생전 모습과 남겨진 아내와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었다. 연신 눈물을 훔쳐대는 분과 그 분에게 우린 울면 안된다고 가족들을 위로하러 온거니까. 쓰디 쓴 커피를 마시면서 아무런 맛도 느끼질 못했다. 케잌과 과일접시를 돌려도 아무도 입에 대지 못한건 아마도 동병상련 같은 아픔에 대한 연민일까. 마지막에 떠나면서 가족들을 만나 우리를 소개하고 함께 산행을 했던 사람들이라니까
미망인은 오히려 산행조심하라고 우리를 걱정한다.
그렇게 나오면서 일행 중 한명과 대화중에 고인은 천주교신자라서 신자들이 이렇게 많이와서 입관식을 도와주고 가족을 위로해 주지만 난 일년에 몇번 나가지도 않는 나이롱 불교신자이다보니 만일 내게 이런일이 닥친다면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나도 마찬가지라고 고인 도사실 가족은 달랑 직계가족밖에 없다면서 그게 이민자의 설움이 아니겠냐고 한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무수히 올라가는 아파트 공사장을 보면서 왠지 낯선 거리에 내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글 전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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