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레인보우 레이크 산행을 마치고 아래 위슬러 시내로 내려오니 옆지기한테서 메세지와 못 받은 전화 몇 통이 와 있었다. 작은 오빠가 돌아가셨다는… 그래서 한국에 가야한다는…
몇년 전에 심장에 스텐스를 넣는 수술을 했는데 혼자 살다보니 관리가 잘 안됐었나보다. 아들도 전부인도 연락이 안돼니 한국의 경찰서에서 옆지기한테 전화를 했는데 받지 못했단다. 장례 절차때문에 가족이라곤 하나 남은 옆지기에게 전화를 한거였다.
이제 성수기라 항공편이 비싼데 왜 이럴때 멀리 떠났느냐고 투덜대는 옆지기에게 형편이 여의치 못한 우리 현실이 나 때문인 것만 같아 미안하기 그지 없다.
쌍둥이들을 외삼촌이 특히 이뻐했는데 아들은 엄마가 오래 집을 비운다고 불만… 딸은 여행가방 써야한다며 엄마 빌려주지 못한다고 했다는데 대해 나는 화가 났었다.
10여년전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가 다 끝나고 한국에 도착했었다. 아프다는 아내를 두고 그땐 그래야만 할거 같았다.
그냥 카드를 긁어 비행비표만 사서 날아간 한국에서 장남이 빈손으로  온 것에 대해 서운했던 어머니가 싫은 소리를 하셨다. 그리 살거면 외국에 왜 나갔냐고.
외국에 나가살아도 한국에서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이 외국 여행하기 힘들 듯이 힘든거라고 해도 이해를 못하셨다.
공교롭게도 그후에는 한국에 다시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도, 장모님이 돌아가셔서도 그리고 최근 제수씨가 멀리 떠나고 슬픔에 잠긴 동생을 위로해야함에도.
나는 결혼식은 참석못해도 장례식엔 참석해 슬픔을 나누어야한다 생각한다. 관혼상제 중 장례식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연속으로 장례식을 참석하지 못했다.
마음엔 늘 찬바람이 분다.
아침마다 찬서리가 내린다.
내일 떠나는 아내의 마음을 조금은 안다.
포도나무는 가지를 잘라서 땅에 심어도 뿌리가 나서 또 다른 생명으로 살아간다. 삶이 힘들고 힘겨울수록 빨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싶다. 많지도 않은 가족이 어려서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식구라고 가족이라고 함께 살다가도 저마다의 삶의 가치관과 조건 때문에 헤어져서 떨어져서 1년에 한번 얼굴보기도 힘들어진다.
아니 외국에 이민오니 10년에 한번 얼굴보기도 어려워졌다. 진수성찬이 아니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라 김치에 찌개 하나가 다인 한끼를 온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지금은 한집에 살아도 각자의 사정에 의해 밥먹는 시간도 다 틀리고 각자의 생활을 한집에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린시절 온가족이 둘러앉아서 없는 반찬… 때론 물에 말은 밥이나 냄비에 볶은 볶은밥이라도 숟가락을 함께 넣어가면서 먹던 그때가 정말 식구고 가족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냉장고가 생기고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게되면서부터 대충 먹을거 마트에서 쇼핑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먹으니 정성이 덜 들어간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일하다가 밭에서 풋고추며 오이를 따다가 장에 찍어먹던 그때 담장에 호박잎 따다가 밥위에 얹어쪄서 찬밥이라도 싸먹던 그 시절이 정말 가족이 아닐까하는 느낌이 든다.
이제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할 가족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가족은 오래도록 함께 있을것만 같지만 사실은 시간과 함께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게 가족이 아닌가싶다.
이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아버지 어머니 매형조카…
장모님 큰 처남작은 처남 그 중에 장례때 간 것 은 아버지뿐이었다. 요즘은 비디오도 많이 남겨서 비디오라도 볼 수 있지만 빛바랜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가족과 추억이 가슴에서 쓰라림으로 갈대가 바람에 비벼대는서 걱댐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든 생각이 이젠 정말 내가 고아구나하는 생각과 나만 바라보는 또 다른 가족아내와 아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강물이 흘러가는것이구나하면서도 가끔은 돌아가 함께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싶은 가족이다.
내가 어린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그 가족은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쑥을 잔뜩 베어다 쑥불을 피우고 모기장을 치고 하늘에 별을 세면서 잠이 들었다.
그 소년이 다시한번 아픈 상처를 가슴에 담고 울고있다.
담담하게 말하는 아내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