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체험에 있어서 “머뭄없이 그 마음을 내어 놓아라”는 말이 있다 . 머문다는 말은 분별과 망상이다. 그렇다면 뭘 분별하고 있는가? 좋고 ,나쁘고 ,있고 ,없고, 손해냐, 이익이냐, 이 모든 머뭄에서 우리는 갈등하고 줄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을 두고 잘 산다 못 산다 측정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그 시간이란 이름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과연 현재가 뭐며 과거 미래 또한 뭔가 ?
그 머뭄과 이들 시제가 만나면  망상이라는 조합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일들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며 모두다 붙잡지만 않으면 흘러가는 일이기에 이들을 현재심 불가득 과거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의미 두고 판단이나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며 거기에는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과거의 일에 미련과 원망을 품고 있고 현재는 살아보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내가 행복하느니 불행 하느니 하고 있지만  현재가 어디 있으며 그 행복, 불행 역시 어디에 존재 한단 말인가? 모두가 망상일 뿐이다.   머뭄은 어느 시제일까?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를 품고 있다는 말뿐이고 시간과 뜻이라는 연장을 들고 사람을 혼란으로 몰아 넣는다. 그 생각이라는 연장은 좋은것이라고 하는 것에만 머물기를 원하고 싫은것은 아짤없이 떼어놓고 싶어 한다. 꼭 좋은것만 탐해서 일어 나는 일만은 아닌것 같다. 때로 브레이크가 가동 될때는 싫은일 에서 도망치고 싶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추지만 이 또한 생각이고 망상일 뿐이다.그럴때 당장 생각을 바꾸면 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의 물결처럼 일어 나는 이 생각을 무슨수로 그때마다 바꿀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뀔것이라고들 말은 한다.
잠시는 그럴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가한 일이며 사람이 만들어 놓은 방법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이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때도 있다. 결국 자신마저도 속이는 괜찮다, 넘어갈 것이다는 생각으로 은폐하면서도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만 그 때는 이미 감정과 행동이 엇박자로 따로 놀게 되면서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자신감의결여로 어떤일이라도 부정적으로 보면서 의심하거나 그걸로 인해 불안해 한다.
대부분의 경우 마음속의 억울이가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런 작업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삶은 어둔밤에 도깨비를 만나 밤새 씨름을 하고는 간밤에 싸우던 도깨비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형국과 같은 것이다.
본시 생각과 감정이란 것이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허상이며 이미 지나가 버린 어떤 현상에 불과한 뜻도 의미도 없는 형체에 내가 끌려 다녔구나 싶다. 그 허상에 사로 잡혀 사는 때에는 멍울과 억울이가 함께 뒤섞이면서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어느누군들 곱게 보아지고 받아들여졌겠는가? 어떤 인연을 만나도 경쟁의 대상이 되었기에 허공에다 줄을 메어 놓고 거기를 타고 올라 가야한다고 하면서 나 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만나면 우월감에 날뛰고 나은사람에게는 아부하게 되든지 만남을 피하고 싶어하게 되었다.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에만 마음을 쓰느라고 정작 가까운 사람에겐 소홀하게 대하고 있는,,,

대부분의 생각과 행동이 손익으로 연결될때가 많았고 나를 내세우고 싶어했으며 용서한다 화해한다고 말은 하지만 이런 일들은 본성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진심이 아니고 목적이 포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삶이 얼마나 가깝하고 답답 하겠는가?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진정, 바란다면 ,이 실체의 경험만이 답일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고쳐먹음으로 해결될수 없다는데에 손을들고 인정하는 변화가 필요했다.그것이 발심이었고 도깨비와의 격렬한 투쟁속에서 고통과 열정이 함께 힘을 합칠때 “한 소식” 혹은 ” 굿 뉴스”의 체험이 가능했다. 발심으로 인한 공부중에 일어나는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대를 비난하고 원망했던 일은 체험하고 나서 보니 그냥 스치고 지나갈수도 있었던 일이었는데 서로가 비슷한 생체기가 있었기에 부딪히게 되고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도 그 이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의 문제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꼴이 되어 버렸다.
누구를 만나도 나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겪어야만 할 일이었다. 상대나, 나, 둘다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기에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도와주면 잘 살수 있을거라고 생각은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서로 계산하고 조종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주먹손이 또 다른 주먹손을 어떻게 감싸줄수 있겠는가?
그런 불협화음을 견디지 못해 배우자든지 친구든지 그 관계맺기가 버거워 또 다른 인연을 맺지만 그 인연도 지나간 인연과 다르지 않음을 보고 참담한 한숨을 내쉬게 된다 . 그러니 그때의 인연은 이전개업 하기전에 그곳에서 해결해야 하지않을까

그 해결이란 것이 만만치만은 않다 . 그러나 ,지금 내 삶의 근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슷한 생각들이 지속적으로 떠올라 힘들고 괴롭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다면 이 본성을 확인하는 체험의 공부를 권하고 싶다.
우리에겐 오랜 습성으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지금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그곳에서 벗어난다는일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죽기전에 한번은 체험하여 진정한 대자유가 뭔지를 삶 속에서 적용됨을 경험해볼만한 일이다.
아오스딩 성인의 고백록에는 이런 글이 있다.
“주님 ! 우리가 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이 마음이 잠잠하지 않나이다” 그 님 이라함은 본성을 뜻한다 . 또 마음 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확인한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은 생멸이 없고 움직여 변하지 않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우리가 겪고 있는 우주의 모든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온전히….
이 온전한 본성을 체험한후로는 뭔가 꼭 해야하는일이 줄어들어감을 느끼고 있다.그것은 어떤 문제가 될만한 일이 있는데도 마음이  금새  본성의 온전한 그 마음 자리로 돌아오고 , 그러기에 휘둘리는 힘은 약해져 가고 , 법의 안목은 넓혀져 가기에 “머뭄없이 그 마음을 내어 놓아라”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말로는 표현 할수가 없어도 알아차리게는 된다. 때로는 어떠한 맘이 편치못한 때가 닥아와도 이 법이 생활에 직접 적용되는 미묘한 힘을 느낄수 있고 어떤일이 있어도 아무일 없는 사람이 될수 있는 법의 안목이 넓혀져감을 감지할수있다.
내 삶의 지난날 겪어야 했던 혼란과 아픔이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원망스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