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쾰른 하늘에 동이 트고 있었다. 이제 막 초경(初經)을 시작한 그녀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더 이상 느껴볼 수 없을 터였다. 훈족의 추장이 그녀를 없애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국왕인 아버지의 명령으로 이교도 국왕의 아들과 결혼해야 했다. 공주의 신분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그리스도를 모시며 순결한 삶을 살고 싶었다. 허나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대신 로마에 있는 교황을 알현하고 오는 3년간의 순회여행을 허락 받았다. 이교도의 아내가 된다면 그녀도 이교도가 될 것은 뻔한 일. 그 전에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떠난 순례여행이었다.
로마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교황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열 한 살 어린 공주의 신앙심이 얼마나 강한지 교황도 놀랐다. 할 수 만 있다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겠다는 그녀가 가상했다. 하나님의 ‘작은 곰’이여. 그대는 이교도의 왕자를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라는 소명을 받았소. 의심치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마치고, 왕자를 전도하는 숭고한 사명을 완성하시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그녀의 숭고함을 방해했다. 쾰른으로 가는 도중 훈족의 습격을 받았다. 호위군사를 비롯, 동행한 11,000명의 순결한 처녀 순례자들이 무지막지한 훈족에 의해 폭행당하고, 겁탈당한 후 살해되었다.
훈족의 추장 아틸라는 그녀의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을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여자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함께 하였던 처녀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는데 혼자만 살아 야만인의 여자로서 치욕적 삶을 연명해가기 싫었다.
드디어 쾰른의 날이 밝았다. 그녀는 야유하는 훈족들에게 둘러싸 있었다. 아틸라는 한갓 정복지의 여자에게 거절을 당하는 것이 추장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전장을 누비면서 보지 못했던 순결한 여인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이 좀 아까웠지만,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이 두목의 법칙이었다. 그래서 그는 팽팽해진 활시위를 그녀의 가슴을 향해 당겼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행위를 알지 못합니다.
‘작은 곰’ 우르술라는 꺼져가는 숨을 모으며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그렇게 그녀는 순교하였다.
콜럼버스가 1493년 두 번째 항해에서 무수한 섬들이 카리브해 연안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당시 성경 다음으로 널리 읽히던 중세 기독교 서적 ‘황금전설’속에 나오는 우르술라를 생각했다. 아무도 범접하지 않은듯한 처녀 섬.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그 순결한 섬들이 무수했다. 마치 우르술라를 따르던 처녀들처럼. 그래서 ‘성 우르술라와 11,000처녀들의 섬(St. Ursula and her 11,000 Virgins)이라고 명명했다. 줄여서 오늘날의 버진제도(The Virgins)가 되었다.
콜럼버스 사후 200여년동안 버진제도는 유럽 열강들의 ‘땅 따먹기’로 이리저리 나눠지게 되었다. 크루즈 기항지인 세인트 토마스섬은 현재 미국령이다. 캐리비안 원주민들이 살던 이곳에 덴마크가 1672년 서인도 회사를 만들어 사탕수수농장을 개발했다. 인력이 달리니까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끌고 왔다. 이것이 세인트 토마스 인구 중 70% 이상이 흑인계열인 까닭이다.
1848년 7월 3일, 버진제도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인력부족으로 문을 닫는 사탕수수농장은 늘어나고, 많은 덴마크사람들과 자유노예들이 모국으로 가버렸다. 더구나 1차대전후의 경제사정 악화로 어려움에 처한 덴마크 정부는 자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하기도 힘든 애물단지 섬들을 1917년, 25백만불 받고 미국에 팔았다. 그래서 세인트 토마스를 비롯, 인근 세인트 존스, 세인트 크로이드 섬이 미국 자치령이 되었다.
그게 섭섭해서일까? 덴마크 사람들은 코펜하겐에 있는 것과 똑 같은 인어공주상을 크루즈 정박 장에 세웠다. 세인트 토마스 곳곳에 덴마크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미국이 아니다. 세인트 토마스섬의 수도인 샬럿 아알리에-이도 덴마크 크리스티안 5세 국왕의 왕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중심에 있는 노예해방공원(Emancipation park)에 미국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유의 종’과 똑 같은 복사본을 1950년 설치해 두었다.  모든 인간은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북쪽에 있는 누군가는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말이다.
그런데 노예해방공원은 2018년 7월부터 시의회 결의로 시장거리공원(Market Street Park)으로 바뀌었다. 주변이 면세점거리라서 이기도 하지만 흑인들이 봤을 때 ‘노예해방’이라는 단어가 ‘노예해방 이전’을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도 정박 지 관광상품을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섬에는 오전 10시에 하선, 오후 5시 30분까지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 나이에 수영이나 스쿠버다이빙, 또는 카약 등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전 조사한 명소를 찾아 여유를 가지고 꼼꼼히 살펴 보기로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99계단과 검은 수염해적의 성(Blackbeard’s Castle)이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우선 역사유적지 도보관광 길(Historic Walking Tour)표지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차츰 걸어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2017년 9월 6일, 일대를 덮친 태풍 이르마가 할퀸 상처가 걸음을 멈칫하게 했다. 널브러진 안내판은 그냥 그대로 있고, 1892년에 해적들의 주거지로 세워졌다가 1906년 호텔로 바뀐 ‘호텔 1829’도 문을 닫았다. 촌스러운 분홍빛 외관이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언제 다시 올 기약도 없는 이곳. ‘꽃할배’의 ‘직진 이순재’처럼 그냥 가기로 했다. 섭씨 30도의 더운 날씨 탓인지, 아니면 기력이 쇠하는 나이 탓인지 도보관광 길 계단 오르는데 숨이 차다. 이러고서 어떻게 아흔아홉 계단을 넘어보나?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계속 직진하기로 했다. 평소 체력관리를 잘해 몸이 가벼운 아내는 이미 저만치 가는데 경사가 있는 언덕길에 나는 벌써 숨이 차고 있었다.
그런데 아흔아홉 계단을 보니 기가 죽었다. 여행이 고생이라지만 이 나이에 ‘극기훈련’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에 아내에게, 당신 힘들지? 그만 돌아가지? 하며 넌지시 떠본다. 순전히 아내를 위하는 것처럼. 그러나 아내 왈, ‘어제 하루 종일 항해하면서 배에서만 지냈잖아요. 운동부족이 될 수 있으니 우리 땀 좀 흘려요.’한다. 늙어 아내의 한마디는 ‘금과옥조(金科 玉條)’. 투덜거리면서 조용히 따르기로 한다.
계단 앞에 서서 올려다 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망설여진다. 아내는 벌써 열 계단 앞서고 있다. 여기 다녀온 한국사람들이 이 계단을 다 오르면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린 것을 보았다. 내 기대수명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차분차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 시작한다.
아흔아홉 계단은 1700년대에 만들어졌다. 계단 블록을 덴마크에서 배로 실어 왔다. 당시는 99계단을 덴마크 말로  ‘스토아톤게(Store Taarne Gade)’로 불렸다. 영어로는 ‘큰 탑 거리(Great Tower Street)’라는 뜻이다. 1679년 지어진 ‘검은 수염 해적의 성’은 원래 덴마크인들이 항구로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기 위한 큰 탑이었다. 그 탑으로 오르는 길이라서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다. 탑 이름도 ‘스키츠보(Skytsborg;수호성)’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당시 카리브해를 누비던 검은 수염의 영국 해적선장 에드워드(Edward Teach)를 연상케 하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하나하나 세면서 계단을 모두 올랐더니 99개가 아니라 103개다. 왜 103개의 계단을 99계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구간을 이어주는 면적이 큰 계단은 계산에 넣지 않았나 보다.
그냥 올라가기 지루해서 아내와 나는 ‘가위바위보’게임을 했다. 내가 이기면 한번에 세 계단 올라가고, 지면 세 계단 내려가기. 아내도 마찬가지 조건이었다. 가위바위보에 약한 나는 자꾸 아내와 간격이 벌어졌다. 마침내 아내는 내가 이기면 다섯 계단, 지면 두 계단 내려가는 것으로 아량을 베풀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여왕폐하. 킥킥거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에 눈시울 붉어졌다. 그것은 ‘동무생각’이었다. <다음호에서 계속>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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