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내가 문학에 눈을 뜬 시기엔 펜팔에 한참 미쳐 있을 시기였다. 처음 펜팔을 한 것은 중학교때 스웨덴의 여자아이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영어를 못해서 당시 영어를 참 잘하던 응한이란 친구가 늘 번역을 해주고 한영사전을 찾아 가면서 편지를 써서 부치곤 했다. 편지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상대이지만 아주 가까이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당시에 난 사춘기였다. 치마만 두르만 다 좋다는 말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어머니 말고는 세상에 모든 여자가 다 여자로 보인다는 어는 드라마의 대사도 이해가 되는 나이다. 사춘기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아마도 정상이 아닐터였다.
동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누구 누구가 누구네 집 빨간 가방 들고 다니는 여자아이를 어떻게 했데가 유행하던 시절이다. 당시엔 하얀 카라에 곤색 상의에 곤색치마를 입고 검정구두를 신은 여학생들이 하얀 카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빛이 나고 광채가 났다. 물론 그 나이엔 화장을 안해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나이라고 하는 말이 맞다. 그것은 늘 만원버스에서 부대끼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버스를 타면 마주보고 서서 버스가 흔들릴때마다 포옹아닌 포옹을 하던 때가 아니던가 말이다.
버스 안내양이 오라잇을 외치고 버스를 손바닥으로 두 번 탕탕 치면 버스는 콩나물 시루 흔들어 고르듯이 좌우로 흔들다 가끔 브레이크도 잡아 골고루 섞이게 했다. 그시절 버스 안내양은 정말 껌을 예술적으로 씹었다. 턱을 예쁘게 움직여서 씹다가도 밉살맞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다. 작은 풍선을 만들어 코잔등에서 푹 꺼져 버린 껌을 다시 씹고는 했다. 하지만 내가 껌을 씹어 본바로는 그리 맛난 것이 절대 아니다. 몇번 씹어서 단물이 빠지고 나면 아까워 벽에다 붙이고 나중에 씹어야지 하고 보면 딱딱해져서 씹을 수 조차 없었다. 그러니 그렇게 멋지게 씹는 껌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늦게 마지막으로 타게 되어 문을 닫지 못하고 버스 안내양이 매달린 상태로 출발신호인 탕탕을 하고 나면 콩나물시루 흔들기가 시작되는 데도 버스안이 꽉차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면 버스 안내양이 떨어 질까 염려도 되고 앞으로 미는 것보다 뒤로 미는게 더 나을 것 같아 뒤돌아 서서 밀다 보면 버스 안내양하고 마주 보게 된다. 온몸을 흔들어서 밀어 넣는 안내양과 나의 거리는 밀착수준이어서 민망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즐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일부러 여학생앞에 서서 있거나 뒤에 서서 엉덩이를 쓰다듬는다던지 하는 성추행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말 그대로 만원버스이니 민망한 상황은 늘 만들어 져서 아랫 도리가 마주쳐서 움직이지 못하고 사춘기의 주책없는 놈은 꿈틀 대기도 한다.
얘기가 학교때 수업하던 선생님처럼 옆으로 샜다. 껌종이를 설명하려다가 만원버스에서 멈춰서 버렸다. 내가 껌을 사는 것은 껌을 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껌종이에 있는 시들을 읽기 위해서였다. 예이츠, 하이네등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껌하고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 껌이란 단물빠지면 별볼일 없는 것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난 우표도 모으고 껌종이도 모아 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객지로 떠돌고 집을 새로 짓고 하면서 다리미며 인두같은 것이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특히 좋아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 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니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라.
당시에 이 시를 접했을때 흡사 푸쉬킨이 나의 생활을 옆에서 보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멀리 스웨덴까지 잘 읽지도 못하는 영어 편지를 주고 받았던 것은 아마도 그런 감성을 깨우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난 국내 펜팔로 돌아 서서 여러명의 여학생들과 편지를 주고 받게 되는데 이 편지가 작문실력을 늘리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시엔 SNS나 인터넷이 없었으니 당연히 칼럼이나 이런 것들이 없었다. 편지로 주고 받는 그것이야말로 리얼한 현장감이 살아 숨쉬는 생황에서 얻는 글쓰기체험이었다.
잘보이려고 문학지를 읽고 시인들의 시를 옮겨 적기도 하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에 점점 빠져 들게 된다. 돈이 없는 때였지만 문학지가 계절마다 나오니 그걸 챙겨보려고 노력했다.헌책방에 가서 수필이나 시등을 마구 탐독했다. 얄미워서 책방주인이 자꾸 밀어 낼때까지 그리 했다. 새책방엔 아무래도 눈치가 봉서 그렇게 오래 책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렇게 바랜 헌책에서 살아 숨쉬는 글이 나온다는게 신기했다. 껌종이에서 시작된 나의 문학사랑은 헌책방과 문학지로 옮겨 가고 있었고, 실습으로 편지를 썼다.
그것은 군생활하면서 힘든 군생활중에도 밤 12시 자정까지 편지를 썼다. 답장이 한꺼번에 오는 날은 3통이 날아 오기도 했다.
나이든 중대 진행관은 재민이 이눔아 넌 만날 편지만 쓰냐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 한 번 읽어 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은 특별할게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보낸 편지 내용에 대한 답이었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편지는 날마다 구타를 당하고 비오는 날 헹가에서 먼지 나게 기합을 받던 나날의 청량제 같은 것이었다. 군대 같았던 직업훈련원에서 동문회보를 홀로 만들때도 훈련으로 힘든 몸을 이끌고 새벽 3시까지 편집을 하고 원고를 정리하던 정신력도 좋아했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다 새벽구보에서 쓰러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현장실습을 나간 금성계전에서 조장을 꼬셔서 편지를 하고 생맥주를 마시고 생방송 라이오 방송에 출연해서 청소년과의 대담을 할 수 있었던 일이나 성공사례발표라고 공단의 직원들 수백명을 모아 놓은 강당에서 연설을 하면서 원고를 넘기지 못하게 떨고 있을때도 미리 써놓은 원고를 믿고 벌인 일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쉬킨의 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