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지나가는 중에 시선이 고정 되는 것은 젊은 여자 아이들의 모습이다.
예쁘게 차려 입은 뽐냄과 긴 머리 찰랑거리며 유행인 듯 앞 머리 잘록하게 맞춰 자르고, 앵두 빛 가득 예쁜 입술로 조잘거리며 떠드는 여기저기의 여자 숙녀 아이들.
나도 이런 젊은 시절을 경험하였기 때문일까? 그녀들의 예쁨에 흐뭇해 지는 미소가 나오는 이유는 그저 부러움 때문일지 잠시 고민에 잠겨 보았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제일 고민스러운 건 행동이나 생각의 제재이다. 
부모 된 마음에 잔소리로 포장 된 훈육을 자꾸 하게 되는 건 걱정이라는 놈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타국에서 공부라는 걸 하는 아이들에게는 학습에 대한 부담과 자유가 공존 하게 된다. 밴쿠버에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주변에서 보거나 들을 때 유학생 아이들의 자유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 곳의 생활을 아는 어른들만이 공감 되어 보일때가 많다. 위험이라는 범위가 학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여학생들의 안위인 것이다.
세상이 요지경이라, 개방형 인간이 되기 쉬운 요즘은 여자로 곱게 사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기 때문이다.
홈스테이라는 일의 끝이 보이는 지금,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여자 학생의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보려 한다.
아주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서로의 가정사까지 알 정도의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가 된 우리네도 속 시원히 말 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이성에 대한 집착이 강한 모습을 보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부모라고 생각하며 가정 교육에 소홀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자유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부재로 정이 그리운건지, 진정 알 수가 없는 문제이다. 
어른 여자인 내 입장으로 고집하는 것은, 나와 함께 하는 딸들은 이런 이성 교제를 하였음 좋겠다.
남자에게 쉽지 않으면서 내 할 일들이 먼저인 주관 있는 여성.
심지어 남자 친구의 자동차도 함부로 타지 말 것과 귀가 시간은 엄수해 줄 것, 옷 차림도 조심할 것 등은 … 처음엔 규율처럼, 이제는 부탁의 말로 다가가고 있다.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하는 아이들임에도 앞으로 펼쳐질 또다른 형식의 이별은 두렵지가 않은 것 같다. 당사자인 아이들보다 내가 더 두렵고 아픈 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지?
사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내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때도 여러 번이다. 성인들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이런 모든 것을 단속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 힘든 건 아이들의 부모들은 그녀들을 너무 모른다는 점이다. 이성을 한번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오히려 성인이 되었으니 홈스테이 보다는 자취가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쉽게 하는 걸 보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든다.
수 차례 이별에 눈물짓는 딸을 경험해 보았는지…
이성에 또 다시 설레어 무척이나 예뻐지는 아이를 보았는지…이 예쁨이 걱정되어 손이라도 탈까 염려는 하였는지…
모든 것을 부모와 공유 하라는 우리의 말을 두려워 하는 아이의 눈을 본 적이 있었는지…
그 동안 큰 탈없이 여기까지 온 시간에는, 늦은 귀가 소식에 속 타는 마음과 술 취해 몸도 못 가누는 계집아이를 데리러 시속 120, 140km로 고속 도로를 달려 본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온 옷에 토한 오물을 묻혀 들어 온 아이를 머리 감겨 주고 씻겨 주며 다독이는 일도 속으로만 분통을 삭이며 지냈기에 우리 아이들은 그래도 잘 온 게 아닐까 싶은데…내 생각만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아이를 타국에 보내며 맡아 주는 현지 보호자를 믿는 것은 기본적인 에티켓인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과의 생활에서 조금은 소극적인 자세는 여자 아이에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겁 없이 남과 잘 섞이는 것과 자유함은 부모들로부터 규제가 있어야 하는 일인 것 같다. 남 학생이라면 어디든 속해보고 크고 작은 사고를 한번씩 친다고 해도 인생의 가는 길에 크게 지장이 있지 않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러한 경험들로 살아감에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은 알고 있는 바이다. 물론, 유교적인 내 사고일 수도 있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손 끝 하나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어미가 딸을 가진 부모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마음엔 옳고 그름을 논하는 이는 없으리라 믿기에 속내를 보이는 것이다.
유학이라는, 그래도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냈을 중요한 일에 정말 끈질기도록 겉치레만 신경 쓰는 부모님이 안쓰럽다. 얼마 전, 20살이 넘은 아이가 외출시에는 항상 오피스 걸인 것처럼 차려 입고, 명품 화장품에 씀씀이가 큰 어른으로 자라는 듯한 아쉬움은~~
내 몫이 아닌 것이다. 처음엔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나누는 기쁨과 수수함의 아름다움도, 그리고 제 나이에 맞는 멋 부림도 가르치고 보여주려 하였기에, 9년이라는 시간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 하였다.
하지만, 남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살아온 세월이 조금은 허망 하기도 하다.
낳아서 기른 내 새끼가 아니라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은 늦게 알아 차린 것 같다. 점수를 만들고 대학을 보내는 건 가능하였지만, 성향은 변하지 않음을 이제 깨달았다.
많은 시간들을 공생하며 바뀐 줄 알았기에 화장기 없이 초라해 보이는 내 차림에도 부끄럽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월160만원의 생활비를 받아 대학 책값에 용돈, 의복 등 생필품과 휴대전화 사용료 등도 지급하며 곱게만 자라 길 바라였던 지난 시간들을 이제는 추억 속에 넣어 두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들과 함께 젊은 학생들 틈에 앉아 있지만, 모든 젊은 이들이 쌍쌍이 앉아 얼굴을 마주보고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행동들의 이 광경은 40중반이 되는 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우니 나도 참 고리타분한 사람이다.
아들이 묻는다.
이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냐고… 어미가 어떤 내용을 쓰는지도 모르는 아이 눈에도, 홀로 경제학 노트를 정리하는 와중에도 주변이 신경 쓰인 건지 그의 묻는 말에~
이 젊은이들이 몇 년 후 나이가 차서 서로를 바라보는 사랑이었다면 더 예뻤을 것이라는 말로 대신하여 본다.
딸을 가진 부모님들이 유학이나 떨어짐을 계획하거나 진행 중이라면 부디 부탁의 말을 전하고 싶다.
몸 가짐도 중요하지만, 생각의 가짐을 먼저 가르치며 한 부모님이라도 동행의 길을 선택하거나, 함께 하지 못 한다면… 진정 믿을 수 있는 부모 대신을 찾기를 권면하여 본다. 그리고, 꼭 건강한 신앙 생활로 자존감을 높이고 외롭지 않음도 지켜 나가기를 더불어 부탁하여 본다. 그나마 일탈의 정도가 작았던 우리들에게는 함께 하려고 노력했던 우리도 있었고, 아이들을 매 주 어루만지었던 착한 신앙인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시작의 추억과 더불어, 이별의 끝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신의 따뜻한 손길이 미치 길 기도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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