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닿는 항구 항구 마다 떠나는 항구 항구 마다/이별의 고동 소리는 안개 속에 울려 퍼지네”
배는 말 그대로 미끄러지듯 마이애미 항구를 떠난다. 하늘은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래, 가라 가. 가버려. 소리치듯 구름이 해를 가리며 흐른다. 카니발 크루즈 라인 난간에서 승객들은 모두 마이애미에 안녕을 고한다.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스쳐가누나. 내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항구 떠나는 뱃전에서 이런 노래를 불러야 좀 고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영락없는 조선된장. 버터와 마가린을, 치즈와 감자튀김을 자주 먹어도, 역시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순 한국 뽕짝.’ 15년을 서양문화권인 나라에 살아도 감성은 바뀌지 않는다.
아내와 나의 크루즈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2014년 5월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이 처음이었다. 밴쿠버로 이주한지 11년 만이었다. 강산이 한 번 변한 세월을 살다 보니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끔 크루즈 여행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 부부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형편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 것 같은데 왜 여태 크루즈 여행 한번 갔다 오지 않았느냐 하는 의아한 질문은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들인가’하는 의혹을 낳게 마련. 생업과 취미생활, 그리고 교민사회 봉사에 전념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을 뿐이라고 답하지만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고 자존심도 상했다. 해서 더 늦기 전에 본격적으로 여행 다니기로 한 것이 알래스카 가던 해였다. 즈음하여 ‘수필시대’에 ‘문학이 숨쉬는 현장, 캐나다 편’을 연재 중이었으니 숙제처럼 여행을 다녔다. 캐나다뿐 아니라 캐나다 사람들이 즐겨가는 여행지도 더해졌다. 뒤돌아보면 참 여러 곳을 다녔다는 생각이 들지만 늙어 기력 떨어질 때 잠 못 이루는 밤, 아내와 두런두런 나눌 추억거리가 풍부하다면 그로써 족할 터였다.
2018년 1월 20일. 토요일이라서 마이애미 도심 숙소 주변은 한산했다. 미리 크루즈 터미널 가는 택시를 불러야 하나 생각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곳곳에 빈 택시가 눈에 띈다. 마침 호텔로 들어오는 택시 중 비교적 깨끗하고 중형 급 택시를 잡는다. 넉살 좋게 보이는 택시기사는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쓴다. 스페인어를 배운 아내가 나보다 기사의 말을 더 잘 알아 듣는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 갈 카니발 글로리 호의 선착장을 모른단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배마다 정박하는 선창(Dock)이 다른데 몇 번 선창이냐고 묻는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관광객은 ‘봉’이라는 택시기사의 ‘촉’은 전세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선착장까지는 잘 왔는데 그날따라 무려 여섯 척의 크루즈가 정박해 있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심지어는 잘 못 들어왔다면서 다시 돌아 나가고. 10불이면 족할 택시비를 두 배나 지불하고서야 카니발 글로리호가 정박한 선착장 앞에 데려 주었다. 자기도 미안한지 연신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하며 굽신굽신. 쿠바에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마이애미에 와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데 벌이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는 초로의 피곤한 기색 앞에 잠깐 ‘봉’이 되었던 불쾌감은 접기로 한다.
떠나는 항구. 힘찬 뱃고동소리가 비로소 즐거운 카리브해 여행을 부추긴다. 마이애미를 향해 이별의 손짓을 하는 형형색색의 여행객들은 모두 기대에 들떠있다. 밴쿠버에서 출발하는 알래스카 크루즈를 밴쿠버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듯, 마이애미 사람들이 배에 많아 보인다. 쿠바나 남미 계 이민자들이 많은 마이애미. 어렵사리 돈을 모아 꿈의 여행을 떠나는 그들의 감회는 한껏 벅차 오르리라.
마이애미 항구와 작별을 고하고 둘러보는 유람선. 오후 4시에 마이애미를 떠난 배는 내일 오전 9시에 하프문 케이(Half Moon Cay)에 정박한다. 그 동안 선박 내를 둘러 보는 것도 크루즈 여행의 즐거움이다. 우선 객실의 구명조끼와 갑판의 구명정을 확인한다. 출발 전 안전훈련을 통해 객실 별로 어느 비상구로 가야 하는지 교육을 받았는데, 비상시 한 척의 구명정에 150명이 탈 수 있다고 한다. 배가 침몰하면 우리가 묵는 7층 객실이 비상구와 가까우니 탈출 시 유리하겠지. 필요 없는 기우(杞憂)에 슬그머니 안심(安心)을 얹는다.
배의 내부는 3층부터 5층까지가 개방형이다. 계단으로 연결되어 한눈에 들어온다. 중앙에 공연무대가 있는데 소리가 위로 올라 온다. 14층 구조의 선박에 객실은 7개층이다. 나머지는 식당, 공연장, 카페, 어린이놀이터, 체육시설, 의료실, 스파, 화랑, 카지노, 사진관, 기념품 점 등이 분산되어 있다. 110,000톤 중량의 이 선박에는 2,980명의 승객이 7박8일간 여행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출입이 불가능한 최저 층 기관실을 제외하고는 여기저기 기웃기웃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 휴대폰의 만보기를 확인해 보니 만 이천 보를 걸었다. 하루 권장 보행 량을 초과했다. 나이 드니 밤잠이 더뎌 애먹는데 이 날은 침대에 등 붙이자마자 꿈나라로 직행. 그 나라에서 어린 시절의 아들과 여전히 건강한 부모님을 만났다. 살아 계시면 함께 크루즈 여행을 했을 터인데. 돌아가신 지 아득하지만 서울에 함께 있을 때도 더 잘 모시지 못한 후회는 생시이다.
잠에서 깨니 오전 일곱 시. 부랴부랴 9층에 있는 뷔페식당 ‘리도’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길게 늘어선 줄에도 사람들은 즐겁다. 미지와의 조우에 모두 가슴 들뜬 듯하다. 내 뒤에 줄 서있는 백인 남녀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슬쩍 귀동냥한다. 카리브 여행은 동, 서, 남쪽 노선으로 나눠지는데 그 중 우리가 가는 서쪽이 가격도 저럼하고 볼 것도 많아 좋단다. 부부인지, 친구인지, 혹은 불륜(?)인지 모르지만, 뭐 어떠랴. 40대 중반의 남자는 로버트 레트포드의 푸른 눈을 가졌다.
금발의 여자는 30대 초반, 아니면 후반 정도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많이 하고 여자는 듣고 있으면서 명랑하게 깔깔거리는 것을 보니 부부는 아닌 듯하다. 오래 산 부부는 서로 대화가 무미건조한 법. 혹 신혼이라면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의 관계를 궁금해하는 오지랖은 맛있는 아침식사에 묻어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