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일곱째 아들이다.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선택하시기 위해 이새의 가정을 찾았을 때에 아들들 중 아무도 선택하지 못 하셨고,이에 예수님이 더 이상의 아들이 있었는지를 물었으나…이새는 일곱째 다윗은 쓸모없는 아들이라며 보여 주기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양치기인 다윗을 택하셨고 골리앗을 이기는 놀라움과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기독교의 역사가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부모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실수를 엿볼 수 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내 아이의 부족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아이의 미래까지도 단정짓게 되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의 가능성의 범주는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이미 주어져 있을 그 영광의 가치가 어디까지 일지를 모든 부모들은 믿고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믿음이 제2,3의 다윗과 같은 승리의 영광을 갖게 할 것이기에,오늘도 혹시 내 아이에게 상처의 말을 하였다면,아이를 꼭 안아주며 “미안하다” 말을 전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번째 어느 날)
처음 밴쿠버에서의 유학생활을 지내며 유난히도 가깝게 지내던 집사님 가정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의 늦둥이 딸아이와 유학을 오셨던 그 분을 나는 마치 엄마처럼 따랐고, 2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족처럼 대부분을 공유하며 지냈던 그 시절이 있다. 주중의 많은 날들을 식사를 하고, 우리 아이들 그리고 집사님 아이의 생일 등도 함께 치르며 우리는 하나의 가정처럼 보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로를 챙기고 의지하며 보냈던 시간들 중에 관계의 위기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함께 다녔던 외부 활동 기관에서 우리 아이들과 생긴 오해는, 집사님의 마음에 상처를 갖게 한 것이다. 생각하지도 못 했던 상황에서 생긴 오해였기에 마음을 풀어드리고 싶었고, 여러 차례 노력을 하였지만……, 관계는 그렇게 끊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나는 그 후로 유학생의 부모님들과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관계는 갖지 않는다. 내가 직접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또래 아이들을 많이 거닐고 있는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일이 만들어 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귀하게 만난 소중한 이를 준비없이 잃어 본 적이 있는 이방인들이라면 공감이 갈 것이다. 6년이라는 세월동안 수 없이 생각이 났었다. 아이들과 관계된 오해만 없었더라면 지금도 서로의 자녀가 커 가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외로울 때 의지가 되는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 것이다. 남편은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그리워하였고, 마음 아파하였다면 충분하다. 이제 그만 잊어라”라고……
많은 자녀와 함께 지내다보면 포기할 일도 조심스러운 일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상대방 아이의 부모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그 때 집사님께서도 당신의 소중한 아이와 관계가 있었고, 누군가 중간에서 잘 못 전해준 소식들이 상처로 남았기에 그 상황이 용서가 안 되었을 것이다. 비록, 나는 알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관계 속의 대상이 내 아이들이었기에 지난 세월동안 아팠고 나 자신을 내려 놓기를 계속 반복 중이다. 어느 날이면 전화로 연락을 드리고 싶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이면 답장이 없는 메일이라도 다시 전달하고 싶었지만, 거절 되었던 기억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 다시 외면당할지 모를 상황이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슴속에 아픈 응어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오랜 내 마음을 들어주신걸까?
며칠 전, 집사님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고, 나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시는 그 날… 마음 속 답답함 한 가지가 사라졌다. 거절당할까 봐 연락 못 드렸다는 내 말에 “누구라도 먼저 했어야 해~”라고 답해 주신 그 날 나는 깨달았다. 잃고 싶지 않는 관계 속에서는 미움 받고, 거절당하는 상황을 미리 단정 짓고 피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유학생들의 부모들은 자녀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와서 눈물로 그리고 외로움으로 자녀를 키우고 있다. 자녀와 관계된 모든 일들은 예민한 상황으로 다가온다.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더 이해했어야 하였고, 더 적극적으로 상황의 오해를 풀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 하였기에 아직도 난 성숙하지 못 한 것이다. 오랜만에 나눈 짧은 대화 후에 다음을 기약하였던 그 날, 언제나 챙겨주고 나누는 마음이 넉넉하셨던 집사님은 아이들 주라고 하시며 봉지에 빵을 가득 담아주셨다.
변하였다고 생각된 것은 상대방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어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 이유는, 미안함과 후회로 남는 마지막이 아니라……,
내 기억 속 우리들은, 주일 예배를 마치고 두 가정이 우리들의 공간으로 뛰어 들어와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를 길게 앉아 수박과 과자를 먹으며 웃었던 그 날이 떠 오르기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주일 오후이다.
많은 아이들의 홈스테이 엄마 이모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축복 속에는 반성과 고침 그리고 나누는 결론을 갖게 되는 이 사명된 삶이 주는 충분한 은혜라는 생각이 한다.^^
(두 번째 일상)
-20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청춘에 대한 생각-
요즈음 큰 아이들의 문화는 가끔 나의 두뇌를 정지시키고 가슴을 무너뜨릴때 가 있다. 아이들의 대인 관계나 생활에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종종 접하기 때문이다.그리 멀지 않은 세월에 나 또한 대학교 새내기였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때의 친구 관계와 지금 아이들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동성 사이의 관계는 얄팍한 우정으로 보이는 것이 다반사이고, 이성지간의 관계에서는 짧은만남의 기간과 이별의 모습들이 너무도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쿨’한 것이 멋지게 보여서일까?  어디에서도 무게감을 갖고 이루어지는 관계를 찾아보기에는 쉽지 않다.
아이들의 놀이 문화 또한, 별개 없어 보인다. 쉴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약속을 잡기 일쑤이고, 번화가의 좋은 음식점을 찾아 즐기며 먹고 마시는 문화가 대부분이다. 물론, 운동을 하고 자신의 관심 분야에 맞는 특별한 것을 찾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보살피는 아이들에게 나는 ‘관심’이라는 핑계로 잔소리처럼 들릴 생각을 늘어 놓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가장 빛날 수 있을 20대의 시작을 공부만 하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나이에 할 수 있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하라고 귀띔하는 것이다. 꿈을 갖고 설계해 가는 인생, 신중하게 맺어지는 인연과의 예쁜 사랑과 우정, 젊음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특권을 맘껏 설계하기를 응원하는 바이다. 가치있는 것에 웃고 눈물 보일 수 있는 그런 청춘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노원장

facebook_밴쿠버 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