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애기를 낳으면서 걸려오는 전화는 마음이 쓰일때가 많아졌다. 즐겁고 편할 때보다는 힘들고 속상하다고 할 때가 더 많았고 애기가 아프다고 할 때는 막막하고 안타까움이 앞서기에 난감해진다. 오늘은 사위가 딸에게 관심이 없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과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내가 딸의 편에 서서 얘기 해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딸의 말대로라면 “이 놈의 자식 나쁘네 “하는 맘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딸은 누구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에만 쏠려 있는 상태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줘도 해결 될 수 없는 수위를 넘어선 것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딸에게 “너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도움을 청하는 말을 하든지 혹은 못한다고 말해”라고 해 불에 석유를 부은 격이 되어 버렸다.

왜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을까?
딸이 나에게 뭘 바라는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내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 바램을 묵살하지도 못하고 들어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나의 어려움만, 나의 처지만이 떠올랐던 것이다. 옳고 그름의 분별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딸은 목소리가 큰 만큼 자신감은 떨어지고 자신의 약함을 다른 걸로 내세우고 싶지만 그것 또한 만만치만은 않은 일임을 알고 있기에 그런 사단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런 아쉬움과 불만이 있기에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기를 바라다가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는 슬프고 화가 나기에 공격하고 원망하는 방어기제가 오늘처럼 발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두려워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스럽기도 하다. 딸은 약하기에 강한척 할 뿐이다. 이쯤되면 나에게도 마음에 먹구름이 자리잡게 된다.

부부사이에도 사랑의 역할보다 손익의 계산바람이 더 세게 불어닥칠 때가 있다. 서로 간에 자신이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양보하며 그런 자신을 상대가 더 많이 인정해주고 고마워해 주기를 설정하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설정과 기대라는 그 동네에는 만족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더 다른 것으로 항상 목마르고 배고픔만이 존재할뿐이다.

펜데믹 이후에 우리모두의 생활이 어느새 예고도 없이 훌러덩 바뀌어 가고 있다. 관계위주의 서로가 만나고 정보를 공유하는 이런 삶보다는 스스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여 자신에게 맞는 정보를 생활에 유익하게 적용하면서 자신만의 맞춤형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살아야 할 때 인것 같이 느껴진다. 그런 생활방식안에서 혼자만의 생활이 영위되지 않을 때 고립되고 뒤쳐진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한층 더 역할을 행사하고 있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 없으면 살아나기 힘든 세상이 도래하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아니 이미 생활 구석구석 그 힘이 뻗치고 있고 어떤 이는 이럴 때를 잘 활용하여 펜데믹 이전보다 더 유익하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는 일이 바이러스병의 증상이라면 이 일을 무엇으로 대체하여 답답하고 때로는 우울하며 불안과 걱정의 증상을 이완하고 통증을 없애는 치료를 할것인가? 이전에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좋은 집에,차에, 맘에 드는 패션에, 보여주는 친구에, 잠시 위로가 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어느 누구없이 그런 일이 멈추어버린 이때 이 시간이 난국이네하고 있을 때인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도 변화는 쓰나미처럼 닥쳐오고 또 다른 변화로 흘러갈 것이다.

그것은 결핍에 대한 모자람을 새로운 도전의 계기로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가져야 할 열개 중에 한 두개가 모자라면 그곳에 집착하게 된다. 일곱 여덟 개의 고마움은 잊은 채 그러고는 그 한 두개를 채우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거기다 쏟아 붓는다. 내 맘에는 딸이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다는 아니였던가보다. 나에게의 결핍은 딸이 나에게 투정하고 공격해 오는 일이 벌어져 서로가 맘이 상하는 일일수도 있다. 그럴 때는 그 일만이 가장 큰 일처럼 느껴지고 딸이 그런 말과 행동만 하지 않으면 살 것 같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며 그때가 나의 결핍의 모습을 보는 때이다. 문제는 서로가 눈에 보이는 자신의 아프고 힘든 것을 원망과 불평으로 해결해보겠다는 생각 즉 망상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곳은 분별하고 비교하고 비판하는 일만 존재하기에 춥고 어두움만이 있을 뿐이다. 나이를 좀더 먹었다는 나나 딸이나 부부생활의 똑같은 저울추의 무게감이 전해질 뿐이었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고 이런 고통과 번민이 생길 수 있을까?
대부분의 원망과 미움과 비난은 자기자신이 용납이 되지않아서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 딸이 생활의 고달픔을 뿜어내고 나는 나의 입장이 난감하고 답답한 것 또한 자신에 대한 기대의 실망이고 설정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이런 일들은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기도를 해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또한 이해로 마음이 바뀌지도 않았다. 이것은 어떻게 라는 설명이 안되고 통하는 체험이 있어야 해결돠는 일이었다. 이 깨달음 이후에는 내 입장이란 것이 없어지고 그로인한 답답한 일이 순간이며 따지고 인식시켜주고 싶다가도 그냥 씨익 한번 웃어주게 된다.
이 공부의 체험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삶과 괴리된 것은 더더욱 아니며 철저한 현실적인 일이 현실의 이마음에 바로 적용되는 대 자유를 맛보는 일이다.지금 이 공부를 하는 분들에게도 뭘 이해시키고 알게 하는 지식을 전해주는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금 당장 맘이 편안해질 뿐이지 계속 일어나는 갈등의 물결을 잠재울 수는 없기에 그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는 달달함으로 맛을 보고 그 만족에 주저앉는 또 다른 분별에 떨어지게 되는 일이고 또 하나의 신설감옥을 만들어 주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손잡아 주기 보다는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스스로 올라오도록 기다려주는 일을 할뿐인 선지식으로써의 사랑의 안타까움이 거기에 있다.

생각의 중독은 알콜이나 마약의 문제와도 별반 다를게 없다. 어떻게 보면 이런 중독들은 겉으로 드러나니 오히려 진단과 치료가 더 가까이 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의중독은 요즘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혼미하게 만들고 쓰러뜨리고 있지 않는가? 거기다 무증상 환자의 바이러스가 더 무섭다고 하니 생각의 병에서의 무증상이란게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볼 일이다. 아프지만 귀찮아서 숨기고 챙피해서 포장하는 일이 아닐까싶다.

딸에게는 어떤 말도 해 줄 필요가 없었고 무겁게만 느껴지던 답답했던 일상이 별일 아닌 것 같이 보였다. 우리 서로 그냥 지나가는 시간 보내는 일에 안달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잇엇던 것이다. 그러고는 오래전에 내가 한 말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삶의 기쁨이었고 우리는 서로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딸은 나에게 고통을 준 것이 아니고 나의성품을 바꾸는 기회를 주었다. 우리 모두는 생각의 고통이라는 연기를 하고 있을 뿐 별다른 그 어떤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딸의 집을 나서면서 나에게, 또 딸에게 이런 말이 어울리겠다 싶었다. “아이구 딸아! 너도 네가 딸 키우면서 자라고 있고 할미인 나도 공부하고 배우면서 커 가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결핍에 대한 도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