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대학로에서 하늘을 나는 돼지 그림이 담긴 ‘만리향’ 포스터를 본적이 있다. 포스터 한 장에서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충격적인 신선함과 이탈의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매진으로 관람할 수 없었던 ‘만리향’ 공연을 초승달 기울던 가을 밤,밴쿠버에서 만났다. 참 달큰한, 이국에서 받은 귀한 초대였다.
연극 만리향의 팸플릿 앞 장에는 ‘상처 주고 위로 받는 그 이름,가족’ 이라는 부제 밑에 낯설지만 익숙한 동네 어귀 중국집 ‘만리향’이 돼지대신 등장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시장기를 부추기는 중국집 메뉴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지저분하고 협소했던 식탁에 앉아 짜장면에 단무지 한 점 남김없이 먹고 입가에 묻히고 나오던 어린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먼저 귀에 걸렸다. 짜장 볶는 냄새가 코 끝에 맴돌고 입가에 침이 고였다.
도시 외곽의 한 중국집 ‘만리향’은 오늘도 한산하다. 한때, 방송국 맛집으로까지 선정돼 손님이 우글거렸으나 중식 고수였던 아버지가 죽고 우여곡절 끝에 큰 아들이 바통을 이어받은 후론 손님은 커녕 파리도 날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허술하도록 일상적인 중국집이라는 배경 속 그들은, 아버지의 부재, 고생으로 연로한 어머니, 유학까지 갔다 와 자존심이 강하지만 속내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요리엔 재능도 없는 무능한 장남과 무당의 딸로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유산의 상처로 얼룩진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건달처럼 사고나 치고 불평불만만 늘어놓지만 속정 많고 해병대?를 나온 배다른 가출한 둘째아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유도선수의 꿈을 버리고배달 일을 도우며 제 자리 매김을 해 나가는 셋째 딸이 있다. 지체장애를 가진 여동생의 실종 등 그들은 내면의 상처를껴안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덤덤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장 보러 나간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라질 당시 입었던 해골 무늬가 있는 옷을 입은 막내를 목격했다고 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시장 통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막내의 모습이 보이고 또 보이는 어머니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한다.
“두 눈 다 멀어도 피 냄새 살 냄새로 자식 알아보는 게 부모다.”
연골이 다 찢어져 인공관절을 해야 할 만큼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는 잃어버린 막내를 찾겠다고 짐을 싸고 말리는 자식들에게 지푸라기라도,아니 거미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굿을 하자고 애청한다.
“사람 찾는 데 선수인 무당이 있다더라. 골골한 할망구가 글쎄, 장군신만 들어서면 돼지 한 마리를 번쩍 들고 술술 답을 한 대.”
자식들은 어머니의 건강과 생사를 알 수 없는 막내를 위해 굿판을 벌이기로 한다. 하지만 굿은 생각보다 비싸고, 심지어 용하다는 점쟁이가 죽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보험 외판원이 된, 장남을 좋아하고 여동생과 유도를 했던 친구 유숙이와 가짜 굿판을 계획하게 된다.
“강둑에서 막내를 봤데…강에 가서 찾아봤는데,뭐가 보여야지…, 막내 눈은 감겨줘야지.잘 달래서 좋은 곳으로 보내주고…그렇게 위안 삼자,우리.”
“이별의굿이네…그런데 살아서 돌아오면?“
“…우리 다 같이…밥 먹어야지.”
가짜 굿을 준비하며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는 것이 없는 무관심 속의 관심으로 일관하고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된다.그렇게 다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 간에 서로 차마 얘기하지 않았던 각자의 아픔, 상처들이 고스란히 터져 나오며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다시 무대는 돼지 머리가 올려진제사상이 차려지고 상부엔 오방색으로 묶인 돼지 한 마리가 놓여있다.
“장군님이 보고파서 산해진미 바치오니 이리 와서 맛보시고 막힌 입을 터 주오.”
가짜 무당이 된 유숙이 방울을 흔들고 춤을 추다 멈추고 접신을 하 듯 온 몸을 떨다, 괴성과 함께 돼지를 들어 올린다.
“신명 받아 도통한다.장군 몸을 빌어 거칠 것 없이 막힘없이 극락 넘고 저승 건너 우주 끝까지 마실 간다.에헤라 디여차라 에헤라 디여차라.”
“아이고!어린 것이 뭣 모르고 강을 건넜구나!가엾은 것이…넋이라니, 혼이라니 웬 말이냐!”
무당의 접신을 통해 가족들이 잃어버린 막내와 아버지의 혼을 만나 서로 가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화해와 위로를 건네며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길가르기를 한다.
“이승의 몸 버리고 극락행 배에 몸을 싣소.서러워 마시오.서러움 없는 곳으로 꽃잎처럼 흘러가오.또 만나오.다음 생에 우리의 인연은 계속 되오.”
극은 벌써 마지막 막을 조심스레 연다.엄마의 아픈 다리에 팩을 갈아주며 모처럼 평온한 모습의 모녀는 두런두런 가족의 염려와 위로 섞인 대화로 품을 넓힌다.재물로 올린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돼지는 며느리에게 반짝이는 빨간 사과 두 개를 안기고 전화에 돛을 달아주고 비상할 채비를 한다.벌써 전화벨이 요동친다.막이 내린다.
극이끝나고,관객들의 환한 표정을 통해 전달된 카타르시스…가짜가 진짜보다 효험 있는 치유의굿판에서 나는 또 한 번 연극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만리향은 멀리 가는 향기로 가족을 꼽았다.가장 사랑스럽고 행복한 가족의 이미지가 아닌, 돼지가 하늘을 보고 날 수 있는 건,목이 꺾어지도록 자빠지고 넘어져 상처가 나 새살이 돋아야 한다는 날개 짓을 보여주었다. 말 안 해도 다 아는 줄 알고 묻고 참고 삼키고 살아가는 가족은 상처조차 치유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가족이란 끈을 돼지가 희생 재물로 떠받들어 질 동안 비로소 나는, 숨죽여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시간을 갖는다.더러는 편하고 가까워서 헐거워진 가족의 끈을 허리춤에 감쌀 소중한 시간이다. 내 마음을 끈 10월의 완연한 꽃 만리향을 품고 귀가를 서두르는 길, 상현달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