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은 행복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일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개인차는 행복에 있을까? 일에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사람들은 행복을 정의하고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행복이란 “아, 이거 아닐까?” 하는 막연한 무엇은 아닐 것이다. 정말 아닐까?

모든 세상사, 인간사가 그렇듯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많은 세세한 일들이 서로 다른 모양과 다른 색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예전에도 행복에 대해서 많은 말과 글이 있었다. 행복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사람들이 툭하면 행복을 말한다고 느끼는 걸 보면 어지간히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거나 행복에 지나칠 정도로 몰입한다고 느낀다. 거의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할 만큼 치열한 단어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치열한 행복은 행복할까? 그것이 진짜 행복일까?
<치열한 행복>이라는 문장은 아무 문제가 없는 완전한 문장일까?
요즘 표현하는 말의 선정성과 폭력성은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도 젊어서는 무언가 규칙이나 규범을 깨는 것이 폼 나는 일일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진행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알 수 있는 일도, 알고 싶은 일도,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긴 치마를 입고 있으면 놀랄 만큼 짧게 입고, 모든 사람이 입고 있으면 벗는다든지, 변형하고 바꾸고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이 곧 새로움이 아니었을까? 필요나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목받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쉽게 알맹이와 깊이가 없는 현상을 만들고 그 현상에 쉽게 동조하는 심약한 사람을 부추겨서 세상을 호도하는 것이라 의심이 든다.

정원의 꽃이, 길가의 들꽃이 아름답지만, 많이 아름답지만 냉수 한 잔이 시원하지만 푸른 하늘을 보면서 들이마시는 공기가 상쾌하지만
같이 사는 늙은 아내가 의심 없이 아름다워도 드라마의 젊은 탤런트와 비교하지 않는 것처럼, 오렌지와 사과와 수박의 맛을 비교하지만 그 맛의 가치나 깊이를 정하지 않는 것처럼, 스테이크와 바다가재를 불고기와 갈비찜을 비교하지 않고 모두 좋아하는 것처럼, 그것은 나름대로의 향기와 맛과 가치가 엄연히 다르고 나에게 모두 필요한 것처럼,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없어도 부족함이 없는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나는 행복을 스토킹하지 않는다. 행복에 미친 듯이 목을 매 시벽부터 줄을 서지도 않는다.
보다 더 자극적인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대신 나 스스로를 궁핍하게 만들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맛을 느끼려고 한다. 호들갑을 떨며 산 정상으로 올라간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온실에서 자란 장미 백송이보다 나의 뒤뜰에 자신 있게 핀 꽃 한 송이를 아내에게 선물하고 비싸지 않은 와인을 한잔 하면서 비록 지금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나중에라도 알 수 있는 행복을 기다리며 살겠다.

지금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된 것.
지금 아니라고 하다가 나중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지금 그저 그렇다가 나중에 많이 좋은 것.
밖에 나가 찾던 파랑새처럼 아무 곳에도 없었으나
돌아와 보니 집에 있었네 하고 놀라워하는 것.
이런 것에 있으면 된다. 예전에도 거기 있었고 지금도 거기 있는 행복.
아내가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아, 정말 예뻤구나.” 감탄하게 된다, 그 때 아내를 만나던 나의 사진을 보면 ”아, 정말 젊었구나”하고 감탄하듯이.
자신의 삶이 타성에 빠져있을 때. 행복감에 젖고 싶을 때 내 안에 있는 여러 개의 감탄을 조금씩 꺼내보고 조금씩 그 행복을 꺼내서 촛불처럼 켜놓는다.
값 비싼 조미료라도 너무 많이 쓰면 음식 맛을 망치게 되거나 그 음식을 삼류로 만들게 마련이다. 다른 맛이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
오늘,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