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한인 이민사 칼럼 3>

 

계묘년 새해. 설날을 맞아 한국은 3천만, 중국은 11억만명이 고향방문에 나섰다고 한다. 코로나에 대한 방역규제가 완화된 탓이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고향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
한문의 사람 ‘人’자는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의지하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함께 해야 삶의 의지를 돋우고, 희로애락의 감정도 나눈다.
밴쿠버 초기 한인사회는 어떠하였을까? 한인 이민자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던 1960년대 중반. 동족끼리 함께 모여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밴쿠버 한인 디아스포라의 구심점, 이 역할을 한 것이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이다.
밴쿠버 초기 한인 사회에 대한 첫 취재로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Korean United Church of Vancouver)”를 찾아 갔다.
밴쿠버 한인연합교회는 2023년 3월이면 창립 57주년이 된다. 캐나다 서부 최초의 한인 교회로 1966년 3월 6일 UBC 밴쿠버 캠퍼스 유니언 신학교(현 Vancouver School of Theology) 강당에서 3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밴쿠버 한인연합교회는 ‘한인회’와 ‘한글학교’, ‘한인 노인회’를 창립하는데 주역할을 담당하는 등 밴쿠버 한인 초기 이민역사 그 자체이다.
초대 이상철 목사에 이어 반병섭 목사, 한학수 목사, 이재형 목사, 김보정 목사가 역임했고, 현재 우종철 목사가 담임 목회자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한인 사회 발전을 위해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인 2세 봉사단체 C3창립과 지원, UBC 신학대학원 장학금 지원 등 차세대 후원을 통해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밴쿠버 다운타운 동부의 노숙자 잠자리 및 식사를 제공하는 퍼스트유나이티드처치를 후원하고 유진벨재단을 통한 북한 결핵 환자 돕기와 사랑의 빵 선교 등 구제 후원사업으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 3월 2일에 발간된 <뱅쿠버 한인연합교회 20년사> 내용 중에 밴쿠버 초기 이민사 내용 위주로 발췌하여 소개한다. 교회사 20주년을 맞이하는 목회자들의 감회에서 종교 모임 이전에 고국을 떠나 정착한 이민자들이 캐나다 땅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였던 당시의 회고가 소중하고 생생하다. 교회가 구심점이 되어 한인 사회가 뭉치고 결속하는 모습, 신앙 생활에서 나아가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동족애가 느껴진다.
“카나다 이민 초창기에 뱅쿠버에 한인 연합교회가 서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은혜와 긍휼과 자비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합교회는 문자 그대로 친교와 만남과 사랑의 요람지가 되었고, 위로를 주고받는, 눈물을 씻어 주는 곳 서로 격려해 주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적인 신앙 노선과 청교도적인 신앙의 경견을 그리고 교회 연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교회가 사회의 양심의 책임을 다하려는 교회의 전통을 오고오는 세대에 길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인용 발췌: 뱅쿠버 한인 연합교회 20년사 한학수 당회장 권두언)

“내가 1961년 뱅쿠버에 왔을 때는 오장옥 의사 가족과 심선식 의사 가족이 살고 있었고, 죤 리라는 젊은 분이 써리 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종종 모여서 한국 음식을 즐길 때면 내가 식사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아마 뱅쿠버에서 한국인들이 함께 기도하는 생활을 시작한 출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니온 신학교라고 불리운 현재 뱅쿠버 스쿨 오부테오로지 학생 휴게실에서 한달에 한번 모일 때는 교인이나 불신자의 구별없이 누구나 왔습니다. 찬송가 책도 가지고들 있지 않고 또 대부분의 분들이 찬송가를 부를 줄을 모르는 처지라 한국 민요나 동요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기도하기도 했었다 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속에 동족애가 엉킨 기쁨이 있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인용발췌: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 20년사 이상철 목사 축사)

“뱅쿠버 한인 연합 교회는 이곳 한인 이민 역사와 함께 시작된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이민사도 20년이 되는 것이다… 한인 이민 사회가 형성되는 곳에 세워지는 교회가 거의 다 그러했겠지 마는 뱅쿠버 한인 사회는 유별난 데가 있었다.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다음에 한인회가 조직이 되었는데, 한인회 일이 곧 교회 일이었다. 1969년 나를 목사로 청하는 위원회 속에 한인회 대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1972년까지 한인회 총회는 주일 예배 후 교회 친교실에서 개최되었다. 매주일 예배 후 친교 시간에는 예배 인원보다 더 많은 교민들이 모여 친교와 소식을 나누기도 하고 체육관에서는 열심히 배구를 했다. 1976년 이후 교민의 수도 천명선을 넘게 되고 교회도 하나 둘 더 생기게 됐다. 그때까지 교회는 문자 그대로 한인 커뮤니티의 구심점 센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69년에 창설된 한국 총영사관의 총영사를 비롯한 직원들도 교회와는 늘 밀접한 관계를 갖곤 하였었다. 총영사관에서 주관하는 3.1절 행사 때도 목사는 기도를 했고, 총영사가 부임, 전출로 가고 올 때는 교회 친교실에서 환영, 송별 케익도 잘랐다.
교회에서 만드는 ‘주보’도 지금의 형식이 아니고 제호를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신앙, 교양, 뉴스 까지를 실리는 뉴스 레타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뱅쿠버를 떠나기 전까지 B.C순방이라는 것을 했다. 그것은 1971년부터 시작한 것인데 B.C주 내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포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몇 가지를 회고하다 보니 뱅쿠버 한인 연합교회의 20년사를 둘로 구분하여 전 10년을 “커뮤니티 센터 로서의 교회” 후 10년을 ‘커뮤니티와 함께 성장하는 교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인용 발췌: 밴쿠버 한인 연합교회 20년사 반병섭목사 축사)
역사는 기록이다. 초기 이민자들의 삶의 흔적. 그나마 연합교회 20년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 늘푸른 장년회는 <밴쿠버 한인 이민사 보존작업>을 시작하였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여기 동참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