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몇일 후다
읍내 약재상에서 약재를 구한 신랑은 약사발을 들고 나이어린 각시 발 앞에 조용히 밀어 놓았다. 각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약 사발을 바라보며 잔 한숨을 짓는다.
신랑이 부탁이라도 하듯 어렵게 입을연다.
“권씨 어른이 이 약을 먹고 낳았다니께 들어봐유.”
여전히 약사발에 시선 보내고 있던 각시가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도대체 이 뜨거운 눈물은 무엇인가.. 황급히 무릅 걸음으로 다가 앉으며.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내 치겠시유”
잠시 눈믈을 갈무리하던 각시는 떨리는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아니유..부모님이 정해준 인연을 믿고 마시겠시유.”
이번에는 신랑이 눈물을 쏟는다.
“고맙구먼유..고마워유..”
여지껏 한번도 잡아보지 못한 각시의 손을 덥썩 잡았다..차갑다..시리도록 차가운 손길 이었다.
원래 여자의 손은 차가운 것인가……
허긴 엄니가 돌아 가셨을 때 “미안하구나 네게도 이빠진 사기 그릇 같은 각시라도 짝을 체워 주려 했는디” 탄식을 하시며 손을 놓을때도 차가운 손길이었다.
여름의 뜨거움을 덥고 가을을 거쳐 첫눈이 왔다. 보기에는 익숙한 풍경이나 일손을 놓고 조급증이 난 농부에게는 흙냄새가 그리운 적막의 시간이다.
양철 지붕위에 사그락 떨어지는 눈 송이는 새앙쥐가 먹이를 찾아 집중하는 발소리 같고 눈이 쌓여 떨어지는 소리는 아이들이 썰매를 타다 궁둥방아를 찢는 소리 같기도 하다.
권씨 할매가 눈오는 하늘에 대고 궁시렁 거리며 들어섰다.
시어미처럼 이물없이 들락거리며 며느리에게 일을 가르치듯 늙은 신랑에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병자는 뭐니뭐니 해도 잘 먹여야 되는겨 그중에 산채가 제일 좋지..비얌도 좋기는 한디 값이 엄청나야지? 육기는 개고기가 최고여..”
그러나 올때 빈손으로 오는 법은 없다. 산에서 나는 뿌리 식물이 전부 이지만 올망 졸망 싸들고 와선 이건 이리 먹고 저건 저리 먹고 모두가 약이니께 절대로 버려선 안된다 했다. 각시가 민망하다는듯 나오려는 기색이 보이면
“나올꺼 없네 달도 차야 기우는 법이니께..약 잘먹고 지두리면 때가 올것이여..지.두.려…하하하”
경로당 쪽으로 기우뚱 걸어간다.
계절은 바람처럼 왔다가 물거품처럼 빠지는 것인 가…?
물빠진 들에는 풍요로움이 자리하고 따스한 부드러움은 마음을 녹인다. 산곡의 눈먹은 물이 도란도란 봄소식을 알리면 성질 급한 개나리가 속순도 없이 서둘러 핀다.
겨우내 방에만 갇혀있던 각시도 따스함을 찾아 아까부터 쪽마루에 앉아 있다.
땔감을 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던 신랑이 서둘러 지게를 내려 놓고 각시 앞으로 간다.
“아직도 추운디유 ?”
각시는 말없이 핏기없는 손을 뻗혀 담장을 가리킨다. 거기엔 아무렇게나 자란 개나리 몇 가지가 어줍지않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꺽어 올까유 ?”
“아니유..” 방긋 웃는다.
신랑은 흠칫 놀란다. 여지것 한번도 보지 못한 각시의 모습이다. 그 웃음 가운데는 싱그러움이 넘쳐 흘렀고 마음을 흔들기에 부족함이없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 각시가 원래 이런 모습이었구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황홀했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저기에 꽃밭을 만들고 싶어유..”
“그..그건 내가 만들겠시유..”
“심을것만 있으면 천천히 해보겠시유.. 들꽃도 좋구유..진달래, 철죽도 좋아유.”
염려와 걱정이 앞섰으나 무작정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곤 손쉬운 들꽃부터 시작해서 이웃집에 모종도 얻어오고 야생초도 캐왔다. 볼품없는 꽃받은 제법 모양새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는 두 부부는 마냥 즐거웠다.
그 얼마후다
철죽 몇 뿌리를 캐들고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다 있어야할 각시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급해진 정도치가 외쳤다.
“이봐유 ?..어딧슈 ?” 쪽 마루로 뛰어올라 방문 앞으로 갔다.
“지..여깃시유.”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바라 봤을 때 나무 그늘아래 각시가 쓰러져 있었다.
“아이고..왜 이런데유 ?”
단숨에 뛰어내려 각시를 일으켜 세운다. 그 얼굴은 백짓장 같이 창백하고 무엇엔가 부딛친듯 이마엔 피가 흘러 있었다. 몇번 실수를하여 쓰러진 일은 있었으나 이렇게 험악한 모습은 본일이 없다.
겁이 벌컥난 신랑이 소리를 쳤다.
“마을 사람들~~사람 살려유~~내 각시 좀 살려 줘유~~아이고~~”
몇차례 악을 썻으나 농사철이 시작된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단잠이라도 깨웠다는듯 개짓는 소리만이 사납게 산곡을 울렸다.
“아이고 어쩐데유..아이고” 이때 였다. 급한 지팡이 소리가 땅을 울리더니 권씨 할매가 마당으로 들어선다.
“뭔 일이여?”
“각시가 쓰러졌시유 어쩐데유 ?..”
권씨 할매가 숨이 찬듯 다가 앉으며 팔 소매를 걷어 부친후 맥부터 짚었다.
잠시 먼 산을 바라 보는듯 하더니 머리를 갸우뚱 다시 심각하게 맥을 짚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권씨 할매의 입가에 퍼득 미소가 지나가는듯 싶더니 껄껄대며 웃는다.
“어쩌유..어찌된거레유 ?”
“터졌구만…하하하..각시가 봄바람이 난겨. 새 가슴처럼 팔딱팔딱 뛴다니께”
정도치가 알수 없다는듯 멀뚱멀뚱 바라 본다.
“활맥이 터진겨 하하하…우리 아부지가 그랬는디 활맥이 터지면 어려운 고비는 넘김셈이라고 했으니께 아무 염려 말게..자네 각시 땜시루 내가 마음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아는가? 하하하. 어여 냉수에다 소금이나 쳐 오게. 하하하”
과연 소금물을 마신 각시는 잠시후 정신을차리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따뜻한 봄날을 덥고 뜨거움으로 이어지는 계절이다.
두 부부는 꽃밭을 가꾸는일에 몰두했고 신랑은 심겨진 꽃에서 꽃망울이 터질때마다 즐거워하는 각시의 얼굴 보기에 몰두했다 각시는 모양새를 갖추는 꽃밭에 완성도를 보며 행복해 했다.
꽃이래야 산에 있는 야생초나 들꽃이 전부였지만 그 크기와 계절에따라 이리심고 저리 옮길때 마다 대화의 문이 열리고 서로의 어색함과 일상적인 대화의 벽을 넘어 살가움으로 다가갔다.
마을 아낙들은 “할일도 오살나게 없구만”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들은 다만 민망할 뿐이었다. 화단이 제법 볼만한 그림을 이루고 있을 때쯤. 각시의 몸은 가벼워 보였고 얼굴엔 볼 우물까지 지어 있었다.
권씨 할매가 벌꿀을 땃다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질타부터 퍼 붓는다.
“눈발이 코 앞인디 신선 노름만 할참이여?”
쪽 마루에 자리를 정하고 각시를 꾸욱 내려다 보던 할매가 턱을 하늘로 치켜 들고 소처럼 웃는다.
“허허허 몸이 실해졌구먼 인제 그 몸에서 새깽이도 나오겠는디? 허허허”
권 할매의 예상은 무섭게 적중하고 말았다.
그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산골 눈은 여간 귀찮은일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왕래를 끊고 지루함에 갖혀 하늘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을때다. 그겨울 끝자락에 새댁의 몸에 태기가 있어 그 이듬해에 아들을 보았고 두해를 건너 뛰더니 딸을 낳았다. 고즈녁 하고 삭막하기만 헀던 산골에도 나팔수처럼 아기의 울음소리와 재롱 떠는 소리가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쓸데없이 기웃거렸고 뒷방에 나락이라도 그득히 채워 놓은것 같은 풍요로움에 두 부부의 눈길은 한 것 따뜻했다 큰애는 정연택 이라고 했고 둘째는 정연순 이라했다. 새댁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평화로운 안식을 볼 때 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고마워유..연택이 아부지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유..”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뭔 소리래유? 노총각 딱지를 떼어준 것이 누군디?”
그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애정의 밀도를 더 해 갔다.
잠시 아이를 지켜보던 도치가 말했다.
“그런디 한가지 걱정이 있구먼유. 애들은 미루나무처럼 쭉쭉 자랄 판인디, 초등학교는 그렇다 치고 더 올라가겠다고 하면 가슴이 아파서 어쩐데유?”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각시는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박씨 어른이 과수원을 팔겠다고 내 놓았시유. 아직 넘 보는 사람은 없는디”
마을 옆에 있는 청솔 과수원 얘기다. 대여섯 식구는 족히 먹고살만한 규모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을 판다고 하는 것은 내버리는것과 같다. 마을에는 노인들만 있고 외지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다. 거년에도 팔려다 실패했다.

< 다음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