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어느 교향악단의 말석에서 연주하는
나는 이 음악을 누가 들을까 생각할 때에
듣는 이를 모두라고 생각하였다.
시골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 지저귀는 새는
누구를 위하여 지저귈까?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나이도 성별도 계급도 특정함도 없었다.
당신은 개인이지만 나에게는 모두였기 때문이다.
그 모두는 개별 개별을 존중한 모두였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나는 어떤 특정한 사실과의 관계를 원한 게 아니었고
진심을 다해 모두를 대한다고 믿었다.

이걸 밥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말하려면 분명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밝힐 필요가 있을까?
아니, 나에게 정말 그런 이유가 있을까?
어리석음의 농도가 있다면 어리석음의 양이 질도 정할까?

모두에게 같은 상품을 팔아도
모두에게 그 상품이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사실 개별적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이 가진 가치가 동일하다해도
모두에게 그 사람이 가진 가치가 같다는 것이 맞을까?

누군지 모르면서 무조건 사랑하는 건 무엇일까?
좀 더 힘든 건 누군지 모르면서 미워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모르고 사랑하고, 모르니까 미워하고
모르니까 나에게는 다른 대접을 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우선 그런 상황부터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이 오늘은 매우 낯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