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어나 사천 킬로나 떨어진 토론토에서 첫 비행기로 돌아 오는 엄마와 두 오빠들을 데리러 가는 공항에도 따라 가지 않고, 2층 창가의 제 방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손녀를 불렀다.

“초롱아! 할배와 공원에 산책하러 가자꾸나!”
“그랜파!  ‘아이리스’라 불러 주세요! 플리~~즈!!”

남의 나라에 살며 늘 민족과 고국을 생각하라고, 손자들은 옛날에 왕을 의미하던 한(Khan)을 붙여 아이들 영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초롱이는 무지개를 상징하는 우아한 붓꽃처럼 예쁘게 살라고 ’Iris’ 라고 지어 주었지만, 그래도 일훈에게는 ‘초롱’이가 더 정겹다.
아들 내외가 억지라고 불평을 했지만 소리 성명학에서 이름은 좋은 의미를 담아 불러주면 그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다독였다.

“그랜파! 여기 개미 떼 좀 보세요!  비가 많이 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건 개미들이 큰 비를 피하기 위해 미리 높은 쪽으로 옮겨 가는 경우란다.”
“얘네들은 육포 부스러기를 여럿이 힘을 모아 끌고 가는 것이니 비는 안 올 게다.”
“자연은 잘 관찰하면 모든 것이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돌아 간단다.”
“그 원칙을 잘 알면 똑똑한 거고, 잘 활용하면 현명하다고 한단다.”
“그래서 사물을 잘 관찰하고 활용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단다.”
“그랜파, 그럼 저는 현명한 쪽으로 해볼래요. 그게 쉬울 것 같아요! ㅎㅎㅎ”
“독서는 안하고 게임만 하면, 아는 게 없어 현명해 질 수 있을까요?”

멋 적어 하는 손녀를 위해 화제를 돌리려는데, 여러 마리 큰 청설모들이 겁도 없이 발 밑까지 와서 도토리를 물고 가려 하자, ‘훠~이, 훠~이! 이 녀석들!’ 하며 손을 휘저어 쫓았다.

“그랜파~! 짐승들 괴롭히면 안돼요. 사람들이 폴리스 불러요!”
“물지 않고 도토리만 주워가는 거잖아요!”

할멈이 살아서 함께 왔으면, 이 많은 도토리들을 보고 얼마나 기함을 했을까 싶다. 하루에 몇 가마니도 주울 수많은 도토리를, 법으로 금지된 것이라고 말리는 며느리와 주워 다 묵을 만들겠다고 실랑이를 하며 한탄을 했을 게 틀림없다.
도토리 묵은 몸 속의 독소를 제거해주고, 칼로리가 낮아 아주 훌륭한 자연 다이어트 식품이다. 일훈이 어릴적에는  살짝 얼린 감주와 함께 긴긴 겨울 밤참으로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할머님이 직접 정성 들여 만든 도토리 묵을 잘 익은 김치에 싸서 먹으며, 옛날 얘기를 듣고 또 들어도 요즘 비디오를 보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던 것 같다. 일훈은 동동주까지 한 사발 곁들이면 오래 전에 돌아 가신 할머님을 추억할 수 있는 별미라서 서울서 멀지 않은 퇴촌의 묵 밥집을 찾곤 한다.
할멈이 지난 봄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꼭 아이들을 보고 가겠다며 함께 왔을 때는 예쁘게 가꾼 정원에 여기저기 민들레들이 핀 것을 보고 그렇게 좋아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는 번식이 강해 잔디를 망치고, 엘러지지도 유발하는 잡초라고 뿌리째 뽑던지 약으로 죽이는 예산이 만만치 않단다. 미네랄이 풍부해서 간암도 치료하는 약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고는 더 더욱 민들레를 귀하게 여기며 예뻐했지만 너무 늦게 발견한 간암을 이기지 못했다.
전후 어려운 세월 막내에게 제대로 못해줬다고 늘 가슴 아파했다. 그런 아들이 부모형제를 떠나 이민을 간다고 할 때는 반대도 하고, 숨어서 울기도 많이 했다. 그나마 아이들 사는 캐나다에 와서 좋은 환경을 확인하고서야 섭섭한 마음을 좀 누그러트렸지만, 초여름 민들레 홀씨 따라 훌쩍 떠나고 말았다.할멈 생각에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려 하늘을 올려 보았다. 새파란 가을 하늘에 독수리가 나래를 펴고 유유히 떠 있었다. 울컥했던 감정을 애써 가라 앉히고 어색하게 쳐다 보는 손녀에게 물었다.

“저 하늘에 독수리 좀 보거라. 어떻게 떠있는지 알겠니?”
“정말 날개 짓도 안 하고 떠 있네요! 신기해요!”
“더운 공기가 차가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승풍이라고 한단다.”
“그 바람의 힘과 독수리의 중력이 같아지는 지점을 찾으면, 날개 짓을 안하고도 하루 종일 떠 있을 수 있단다.”
“참새들은 연신 날개 짓을 하며 온종일 힘들게 먹이를 쫓아 다니지만, 하늘의 왕자인 독수리는 저렇게 자연을 이용해 힘들이지 않고 사방 백리를 한 눈에 내려다 보며 여유롭게 먹을거리를 찾는단다.”
“와~~ 대단하네요. 그런데 저 높은 데서 어떻게 땅 위의 먹이를 잡아요?”
“먹이 감 하나를 고르면 날개를 접고 총알같이 아래로 돌진하여 먹이를 낚아 챈단다.”
“백 만분의 일초라도 늦으면 먹이도 놓치고,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산산이 부서지겠지.”
“그래서 큰 사람이 되려면 독수리의 명확한 판단과 정확한 행동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지.”
뜻이나 알아 들었을까 하는데, 역시 망설이던 녀석이 쭈볏대며 물었다.
“그랜파~! 저 게임하다 나왔는데 들어가면 안 돼요?”

옛날에는 온종일 말씀도 거의 없이 앞서 부지런히 가시는 할아버님을 발이 아프도록 따라 다녔다. 게다가 할머님께서 어려운 친척들 갖다 드리라고 곡식이나 반찬거리라도 들려 보내면 더 더욱 힘들어도,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여쭤 볼 엄두도 못 냈다.
종가 댁 어린 손자가 먼 길까지 할아버님 모시고 왔다고 친척들께서 대견해 하시고, 할아버님께서 친척들 앞에서 평소에 하지 않으시던 칭찬까지 한마디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온종일의 노고가 사라지고, 얼마나 뿌듯한지 몰랐다. 친척들을 일일이 돌아 보며 인사시키는 현장 교육의 중요성을 결혼하고 애들을 키우면서야 알게 되었다. 사촌들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요즘 아이들을 생각하면 나이들수록 잃어버린 역사 찾기만큼이나 무거워만 지는 걱정이다.

“오빠들 돌아 오면 얘기 많이 하세요.”
“난 아직 한국말도 어렵고, 그랜파 말은 너무 어려워!”
“오빠들은 태권도하면서 한국 말도 많이 늘었어요.”
“초롱이도 노력을 하면 되잖니!”
“아휴~! 그랜파는 뭐 영어가 쉬워요? ”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외국 여러 나라에 살며 자란 며느리가 나이 들며, 우리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을 했다.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치고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자기가 먼저 태권도장에 등록을 했다. 얼마 후 두 아들을 합류시켜 캐나다에서 최초로 세 모자가 함께 블랙 벨트를 따냈다. 이제는 시합까지 함께 다니며 상을 휩쓴다고 한다.
컴퓨터와 회계를 전공하여 큰 기업들의 재무 자료들을 분석하는 전문적인 일을 한다. 결혼을 하며 출퇴근을 않고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 키우는데도 남의 손을 빌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를 가르친다고 태권도를 자기가 먼저 하는 당찬 며느리가 한 없이 대견하고 고맙기 그지 없다.

“초롱아! 넌 커서 뭘 할지 생각 좀 하니?”
“그랜파는~~, 엄마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태권도하기로 약속했어요”
“태권도 시작하기 전에 게임이나 실컷 해야 되요”
“저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다 해 보고 결정할 거예요.”
“옛날에 나도 할아버님께 그랬단다.”
“열 두 가지 재주를 가지면 굶으니 한가지만 잘 하라고 하셨지.”
초롱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탤런트가 많은 사람이 굶는다고요?”
“캐나다는 탤런트 많은 사람이 잘 사는데요.”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하면 하나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얘기란다.”
“ 그래서 평생 즐겁게, 집중할 수 있는 한가지를 찾으라는 것이란다.”
“ …… ”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려는 아이에게 서둘러 물었다.
“아이리스! 혹시 쇠를 자르는 ‘물 칼’이라고  아니?”
“오 마이 갓!!!   그랜파 ~~! ”
“저 게임 하러 못 가게 거짓말 하시는 거죠?”
“물로 어떻게 쇠를 잘라요?”
“정밀산업에서는 물을 고압으로 압축해서 작은 노즐로 뿜는 물 칼을 쓴단다.”
“쇠톱보다도 정밀하고 깨끗하게 쇠를 자를 수 있기 때문이지.”
“못 믿겠어요, 그랜파! 절대로 네~~버, 에버!!!”

마침 토론토에서 비행기로  날아 와 차에서 내리는 오빠들에게 달려 가 축하인사도 잊고, 영어로 열심히 불평을 털어 놓는다. 그랜파가 물 칼로 쇠를 자른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다고…… 녀석들도 인사를 하면서도 의아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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