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화양연화의 5월23일 자 아야기는 삼풍백화점 붕괴가 주 내용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자기의 한마디 때문에 엄마와 동생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기차안에서 괴로워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트라우마의 표본이다. 트라우마로 인한 폐쇄 공포증을 앓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그려냈다. 물론 작가가 경험한 것일수도 있고 들은 이야기와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를 통해 대본이 쓰여졌겠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편하게 볼 수 없는 것은 따지고 보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연관성이 지어진다는데 있다.

1995년 3월에 캐나다로 이민오고 그 해 여름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일어났다.
삼풍백화점 오픈 초창기에 오픈 멤버로 수영장과 사우나 주방에서 잠시 일했었다. 그리고 스위스 그랜드호텔로 가고 가끔 동료들과 지인때문에 놀러 가기도 했다. 몸은 이억만리 떨어져 있어도 생각은 삼풍백화점에 가 있었다. 뉴스화면에 무너져 내리는 백화점과 수영장 주방에 서 있는 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곳에 일하던 직원들 얼굴이 스쳐가고 움직이지 않는 앨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이는 내가 자꾸 보였다. 초창기 오픈 멤버여서 회장과 사장을 자주 만났다. 회식자리와 근무장소에서 자주 만났다. 당시에 삼풍 백화점은 강남에 세워지는 명품 아파트촌에 명품 백화점을 지향했다. 그전에도 백화점에 근무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80년대 초반 한국의 페밀리 레스토랑을 주도하던 미도파 백화점 식당 부문 코코스의 메인 주방에 일하기를 원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삶의 흐름이라고 생각되었다.
올림픽 무렵이었던가 강남에 특급호텔들이 많이 들어 서기 시작하고 아는 사람이 책임자로 갔다는 올림픽 파크 유스호스텔에 들어 가고 싶어 면접을 봤는데 아는 분도 면접관 중에 한 분이었다. 아니 그가 주도하는 면접이었다. 여기 뭐하러 왔냐는 투의 질문을 해서 서운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면접보기 전에 찾아가서 뇌물을 준 사람들만 붙었다고 한다. 물론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스위스 그랜드호텔에서 대부분이 옮겨간 강남의 인터콘티넨탈호텔 무역회관, 노보텔 등 우후죽숙처럼 호텔이 들어 설때 나도 강남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야간에 대학교를 가야 한다는 조건은 족쇄처럼 나의 발목을 잡았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가게 된 곳이 김포공항앞에 에어포트호텔이었다. 그 곳에서 아내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곳에 일하게 된 것도 운명일지 모른다. 그 곳에서 알게 된 주방동료와 인천의 한 호텔에 잠깐 있기도 했지만 삼풍백화점에서 날 불렀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 오래 근무하지 않고 홍은동의 스위그 그랜드 호텔로 가서 일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이민도 하고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잊어 버렸던 기억들이, 잊고 있었던 얼굴들이 무너지는 건물에 먼지와 함께 떠올랐다.

오늘 또 다시 드라마에서 그 이름을 듣게 되고 주인공이 트라우마로 아파하니 나도 가슴이 쓰리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시간이 모든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잠시 모래로 덮어 둔 불씨처럼 숨겨져 있다가 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 난다.
트라우마나 아픈 기억은 늘 그랬다. 수십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더욱 또렷하게 현장이 떠오르고 아니 현장으로 날 끌어 들여서는 다시 그 아픔을 느끼게 했다. 상처투성이인 온 몸에 소금을 뿌려대듯이 말이다. 이젠 호텔 이름도 잊혀지고 세부적인 일들은 잊혀 졌지만 아픈 기억들만 뇌속에 떠다니다 소금밭에 뒹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