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던 그 숭고한 순간을 기록한 병영 기록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 먹고살고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함께 한 칼(주방칼)과의 인연을 언젠가 한 번은 말하고 싶었다.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의 전기처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육사를 가서 군대에서 짱박았으면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군에서 직업을 바꾼 후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에 가기 전에 이미 농부의 아들로 농사일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하고 있었고 농고를 가기 싫어서 상고를 갔고, 주판알을 튕기면서 넥타이 매고 은행이나 농협에서 일하는 것이 나의 꿈이고 아버지의 꿈인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글재주가 늘 마음에 꿈틀대면서 내가 속삭였다. 너 은행원이나 농협 체질은 아닌 거 같아라고 말이다. 그래서 모 서울대학 지방캠퍼스에 지원하고 아버지의 농약 병들고 반대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함께 밥조차 먹을 수 없어서 무작정 집을 나서자고 나선 직업훈련원에서 또 직업훈련보다 동문회보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바람에 육체미 짱이며 특히 팔뚝이 장난 아니게 기둥 같았던 담임으로부터 모진 매질을 받으면서 충격을 먹고 자격증은 취득을 하고 기계조립 기능사로 금형반에 입사해서 일해보니 이건 뭐 노예가 따로 없었다. 군대 대신 근무한다는 방위산업 혜택을 2년 받고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공군을 지원할 땐 공군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서였다. 혹여 다른 누구네 집 아들처럼 대한항공의 정비사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하지만 역시였다.
군대 35개월 동안 폭력에 시달리고 폭력에 시달렸던 시어머니처럼 나도 폭력을 휘둘렀던 군생활. 그때라고 구타금지가 왜 없었을까? 구타금지 각서를 써내고 내무반에 커튼을 치고 근무시간 중인 점심시간에 식당에 갔다가 내무반에 집합시켜서 때렸다. 기수별로 구타가 내려가니 아래로 내려가면 눈덩이처럼 불어 나던 구타. 여름철에 러닝만 입은 졸병의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고 구타를 했다. 그래야 말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자대 배치받은 날 재래식 화장실에서 케첩통으로 된 휴지통을 엎어서 앉아 기수 표를 외우다 잠들에 새벽에 들어오고 수송대 트럭과 트럭 사이에서 하도 맞아 걷지도 못하던 날들이 많았다.
아무튼 그런 군대생활 속에서 난 바텐더에 꽂혀서 바탠 더를 한다고 책을 사서 공부를 했지만 실기를 먼저 본다는 말에 포기하고 조리사 시험으로 목표를 바꾸고 진주여고에서 필기시험 보고 부산역 앞 동아학원인가에서 조리사 시험을 보았다. 조리사 시험을 보러 군복만 입고 가서도 뻔뻔하게 학원강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햄버거와 숲이 제목이었던 조리사 시험에서 마주 보고 시험 보던 응시생이 중도에 포기하고 나가는 바람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며 작품?을 내긴 했지만 떨어졌던 조리사 시험은 평생 잊지 못한다. 손톱 밑에 새까맣게 떼가 끼는 것이 그리고 기름 떼가 비누로 손을 씻어도 잘 지지 않아 정비사 직업을 포기했다. 장화 신고 하얀 가운 입은 군대 식당의 짬밥 푸는 그들의 모습이 내 미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금형을 끌어올리는 블록체인이 넘어졌던 일도 밤늦게까지 잔업하면서 꾸벅거리고 졸다가 무거운 금형 공작물이 회전하다 가슴을 때렸을 때도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잔소리 많은 선배가 꼴도 보기 싫었고 잔소리 안 들으려면 그보다 잘하면 됐지만 그것도 자신이 없었다.
군대를 제대할때까지 조리사 자격증을 따지 못해 결국 서울 노량진의 모 학원에 등록하고 독서실 책상 아래서 새우잠을 자면서 학원을 다니게 된 서울살이의 시작할 때도 칼이 무섭다고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이를 싱크대에서 다듬는 선배가 알아서 칼질을 멈출 거라는 믿음으로 손을 씻으려고 하다 선배의 칼에 손톱 포함 손가락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 옛날 초보 조리사 보조 시절 난 처음으로 칼이 무서웠다.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맹장이 걸려서 맹장 수술하고 손가락 치료도 같이 하던 그때가 어제 손가락 봉합수술?을 하면서 떠올랐다.
30년이 넘게 조리 현장에 일한 사람이 어떻게 툭하면 손을 베냐, 아빠 와이어 장갑 안 끼었어, 많이 아프지 하고 물어보기보단 왜 그랬어, 증인 있어 라고 물어보면서 손가락 베고 가장 처음 손가락을 움켜쥐고 사무실에 가서 알렸던 매니저가 자긴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하던 말이 서운함을 넘어서 믿음에 대한 배신처럼 들렸다. 매니저도 왜 와이어 장갑을 안 끼었냐고 물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했더니 앞으로는 끼라고 한다. 조리학교나 경력이나 그를 앞선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실력만으로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던 자리에서 내쳐지기도 한다. 칼이 무서우면 조리를 할 수 없다. 조리사는 칼을 무서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냥 조리를 도와주는 도구이니까? 이순신 장군처럼 긴 칼 허리에 차고 조국을 지키는 칼의 노래는 아니어도 먹고살기 위해 늘 내 손을 떠나지 않았던 칼이 날 배신해서 날 다치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날 다치게 한 것이다. 왜냐고 물어보면 나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조심하지 않고 하면서 말하면 내가 많이 잘못한 것으로 들린다. 하필이면 오퍼레이션 매니저가 그때 주방에 나타나서 나의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화가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오른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다. 아직도 디프레션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 피를 뭃게 하는 아스피린 80g짜리도 복용 중이다. 그래서 피가 잘 멈추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꿀럭꿀럭 피가 계속 넘쳐 나오는 손가락을 보면서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처음 로메인 레터스에 숨겨져 있던 내 왼손 엄지 손가락이 칼과 함께 따라 올라오면 일부분이 덜렁거리는 것을 본 순간 이건 뭐지. 왜 하는 생각만 들었다. 왜 더 힘을 준느낌이 드는 걸까? 아픔은 매니저의 말과 대충 붕대로 싸매고 장갑 끼고 일하라고 하던 회사 근무 간호사의 말에 더 아팠는지도 모른다.

 

 

손가락을 베다/전재민

앗 이것은 누구 손가락
놀란 토끼처럼 쳐다보다
피가 줄줄 흐르고 나서야
뭔가 해야 했어
수도꼭지 싱크대서 씻고
페이퍼 타올로 손가락 감쌌지
그래도 페이퍼 타올 타고
흐르는 피
더 많이 페이퍼 타올 감싸고
매니저한테 손가락다쳤다니
심장위로 손을 들고 있으라고
디톡스 근무 배뿔뚝이 남자 간호사가 왔어.
손가락 또 수돗물로 씻고
붕대로 감고 테이프로 붙이더니
장감끼고 일하래
난 그건 아닌거 같아
병원에 가야겠어
응급처치요원이 왔어
지난번에도 많이 베었었지
이 손가락이야
아니 다른 손가락 그리고 오래전이지
어디로 갈거야
페밀리닥터
페밀리닥터한테 전화하니
병원으로 가서 꿰메란다
매니저 말하길 다칠때
증인 있었냐고 물어
자기한테 가장먼저 보여 줬구만
왜 쇠장갑을 안끼고 했냐고 물어
생각안해봤어
앞으론 쇠장갑하고 해그런다
병원 간걸 알면서 전화조차 없어
난 매니저일때 안그랬는데
왜 다쳤냐고 묻기전
많이 아프냐고 물어야지
병원에 접수하니 상해보험에 접수하라고
상해보험에 전화하니
시간있냐고 병원 응급실이라니
응급처치 끝내고 연락하란다
2시 20분에 온 응급실
6시가 되도록 기다리는중
응급실 맞아
급하면 숨넘어 가겠네
6시반이 되서 온 의사 마취하고 삼십분
7시나되서 꿰메기 시작
오랜 기다림
붕대로 싸맨 엄지 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