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현순일 (91세, 6.25참전유공자회 회원) 요약 정리 송요상 사진 이지은 기자>
1956년 5월, 6·25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봄날,  나는 부산역 앞에 자리 잡은 부인회관에 있었다. 지금의 아내와 함께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병원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고 제대한지 3년이 지나고 난 후에 조촐하게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이 치러졌다. 신혼살림은 부산에서 차리고 경남도청에서 6년간 근무하다가 1959년에 공무원에서 퇴직하고 사업체를 운영할 결심을 했다. 곧 나의 생각은 실천에 옮겨졌으며 부산에서 17년 동안 식료품공장을 경영했다.
부친께서는 사업상 맺어진 친분관계 때문에  대구에서 생활하셨고 나의 공장은 크게 번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기복이 없이 운영되었으나 때때로 북녘 땅에 남겨진 동생들과 모친을 생각하면 너무 서글퍼졌다. 교회에 열심히 나서 기도를 드렸다. 그동안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고 언뜻언뜻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가 자녀들을 키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떠나고자 하는 마음은 말릴 수가 없었는지 1976년 남미 파라과이로 농업이민을 결심하고 이민 길에 나섰다. 1960년대의 남한에 브라질 이민 붐이 일어났었는데 부친께서 생존해 계셔서 엄두를 못 냈지만 부친이 작고하신 후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다.
파라과이는 여름철에 40도가 넘는 더위로 인해 농업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포장된 아스팔트도로가 그 열기로 흐물흐물해져 교통사정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비가 오면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아 교육환경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5남매의 교육이 가장 큰 문제였다. 주위에 사는 한국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고 이 곳을 떠나 북미로 이민가고 싶어 했다. 미국에 아내의 남동생 즉 처남이 거주하고 있어서 우리 가족을 초청했지만 때는 월남이 패망한 후여서 월남 난민들이 많아 이민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언제 미국으로 갈지 기약할 수 없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1982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올 수가 있었다. 이주지를 밴쿠버로 결정했다. 모국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밴쿠버에 살면서 공기 좋고, 물 좋고, 병원도 잘 돼 있고, 좋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늘 만족해왔다. 나는 40대 후반이었지만 조그마한 식료품도매상을 성실하게 운영했고 또 아내는 오남매를 키웠다.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축복은 자녀들이 무탈하게 잘 성장했고 생업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었다. 먼저 작은 딸은 1980년대 초에 학교성적이 우수해 미국에 유학 비자를 신청했으나 응답이 없었는데 다행히 캐나다에서 6개월 유학비자가 발급되어 가족 중에 제일 먼저 밴쿠버에 도착해 에보츠포드에 위치한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2년 동안 신학도 전공하고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앨버타 주의 주도 에드먼턴에 있는 한인장로교회에서 근무하고 생활했으나 부모님 곁으로 오기를 원해 현재 스코샤 은행 코퀴틀람 센터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 외에 아들 딸 역시 밴쿠버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삶에 충실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의 인생 여정은 쉴 틈 없이 바빴지만 나의 부지런함이 생활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면서 여유를 찾았고 한인들과의 교분도 무난하게 이루어져 이 모든 생활이 주님의 은총이라 믿고 싶다. 70살이 넘어서 골프모임인 월목회의 회장으로 활동했고, 2008년 6·25참전유공자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초대 감사로 임직했다.?
나의 고향인 이북방문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 20대에 고향을 떠나올 때는 마음이 고향에 있어 언제라도 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지만 40여년 만에 초로의 장년으로 이북을 방문한다니 세월이 무심했다. 노태우대통령의 7.7선언에 의해 이루어진 이북방문이었다. 그동안 한국은 우리가족이 해외로 떠난 후에 놀라운 발전을 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랬다.
해외거주자만 이북방문이 허용되어 6월에 밴쿠버  625유공자 2명의 회원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비자를 받고 고향인 박천에서 동생들을 만났다. 얼마나 어려운 상봉이었던가. 북한 방문 시에는 생활용품들을 큰 가방 8개를 마련해 가지고 갔다. 우리가 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고향집은 새로 단장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북한 정부에서는 해외거주자들이 방문하는 것을 환영했다. 가족에게 물품과 금전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는 북한이라는 생각이 공산당원들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북한에 남아있는 남동생과 세 여동생들과는 안부 편지가 오고갔고 동생들이 계속 돈을 보내 달라는 전화와 서신이 왔으나 쌀만 10가마 보내 주었지만 받았다는 답장은 아직도 받지 못했다.
한국의 국민이나 해외 한인들에게 가장 크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먼저 반공의식을 떠올린다. 현재 젊은이들은 인생에서 좌경화가 얼마나 잘못된 관념인지 실지 체험하지 않아 모르는 것 같다.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또 그 후유증을 갖고 고민하며 자라난 세대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양면으로 지대한 고난을 만들고 삶의 장애로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반공정신이 없는 국방, 정말 안타깝지만 잘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나의 성격이 이를 이겨내고 있다.
나는 56세에 캐나다로 이민 와서 교회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으며 생활하고 있다.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였고 특히 작은 딸이 교회를 내 집처럼 여기고 교회의 어려운 일들을 솔선수범해서 나서고 있는데  가끔 영어권 목사들의 목회를 동시통역하는  봉사도 하고 있다. 아들은 웨스트 밴쿠버에서 그로서리를 잘 운영해 생활에 어려움 없이 지내왔다. 나는 여가활동으로  골프모임인 월목회에서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 모임은  밴쿠버 한인교회의 장로들로 이루어진 친목 골프회이다.
올해 나이 91세. 2016년에는 결혼 6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당시 곱고 사랑스럽던 신부 현정숙씨(89세)와 나는 여전히 행복한 부부다. 2016년 결혼 60주년 기념일에는  다운타운에 위치한 한인 음식점을 빌려 그 동안 친분을 맺어온 지인들을 초청해 기념파티를 열었다. 나의 인생이야기가 현지 한인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 밴쿠버에 살아온 여정 중에 큰 자랑거리가 여럿 있다면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의  손자이다. 이름은 현노아. 미들 스쿨에 재학 중이다. 나의 손자는 포트 코퀴틀람 라이트닝 스케이트 클럽에 소속되었는데 2016년 3월 18일 서부캐나다 쇼트트랙 챔피언십에 출전해 스피드스케이팅으로 금메달 4관왕이 되는 영예를 획득했고 2017년에는 3관왕이 되었다. 2019년에는 올림픽에도 출전할 수 있는 나이가되어 좋은 결과를 맺으리라고 생각한다. 손자의 이 같은 선전에 큰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주위에 전했다.?
2000년대부터는 한인 참전유공자와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들과도 모임이 자주 있는 편이다. 내가 속한 625참전유공자회의 행사시에 캐나다참전용사들을 초청하며 또 그들이 주최하는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두텁게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특히  2017년 3월 5일 밴쿠버의 외곽 도시 칠리왁에서 열린 캐나다 한국참전 용사를 위한 오찬 행사는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재향군인회 서부지회회원들을 비롯해 한인 참전유공자와 월남참전유공자 등 약30여명이 모여 뜻 깊은 친교를 가졌다. 이 날 나는 개인적으로 참석한 캐나다 참전 용사 8명 모두에게 성의껏 선물을 전달했다.
며칠 후 캐나다 참전 용사회의 Ralph DeCo uste. MMM과 Harry Mayne 회원이 감사의 뜻이 적힌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연히 친분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며 그들과의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어서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감사편지를 받은 후 한인 유공자회 모임에서 87명전원에게 이 편지를 소개하고 이 내용이 한인유공자와 서양 참전용사와의 친분이 두터워져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 한인유공자들은 물론 캐나다 참전용사들 즉 역전의 용사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한국의 평화를 위한 역군이었음에 자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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