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여름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 같다. 내가 알던 여름이란, 후덥지근함과 축축한 습도,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 정도였는데, 이 곳은 화창하면서도 몸이 가벼워지는 따사로움. 그러면서도 그늘에 서 있음 얇은 긴 팔의 외투라도 걸쳐야 하는 시원함~
신이 밴쿠버라는 도시의 환경에 온전한 축복을 다 주신듯한 질투까지도 느끼게 한 여름이었다.
 
우리 8명의 완전체는 어느 곳이든 함께 한다. 집에선 물론이지만, 장을 볼 때도 산책이나 공부를 할 때도, 그래서인지 어느 곳을 가든지 우리 가족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대상이 되었다. 처음엔나 조차도 이런 시선이쑥스러웠던게 사실이었다. 늘 조촐하게 지내던 한국 생활과 일을 할 때도 1대1학생 또는 부모를 대하는게 전부였으니…
더구나살림은 주부였지만, 일 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친정 어머니께서 살림을 맡아 주셨기에
여섯 아이들의 엄마 역활을 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 한 것도 현실이었다. 그 때는 그래도 젊음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으며 또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기에 어쩜, 많은 시련과 갈등 중에도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원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생활하던 타운 하우스는 지금 생각 해 보면 너무도 작고, 이웃 주민들의 생활이 굉장히 독립 적이었던 곳 이었다.
각자 생활에 충실하며 다른 집의 생활은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문화라고 할까, 아님 그 마을의 성향이라고 할까?
어쨌든우리 가정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덜 생각해서인지…
세탁을 해도 자연 소독을 이유로 건조대에 널어 테라스에 두었고, 아침만 되면 환기 시킨다고 문을 벌컥벌컥 열어두며 식사하는 모습, 아이들과 공부하는 모습 등…
우리들의 생활은 앞 뒷집에 막 오픈이 되는 매일이었다.
그 땐 몰랐지만, 우리 아이 또래를 둘 두었던 앞 집의 백인 아저씨가 왜그리도 우리 가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학기가 시작 되기 전 일상은 파크에서 운동을 하고, 드라이브와도서관을 다니며저녁엔
영어수학 학습을 하면서 정말 알차게 보냈던 우리들이었다.
한국의 일상과 많이 다른 일과 중 하나는 축구나 발야구 등의 운동을 여덟명의 가족 모두가 비가 내리는 날이 아니면 매일 함께 즐긴다는 것이다.
웃고 넘어지고, 경쟁하며 응원도 하고 때때론 부상의 투혼도 펼치며 마흔이 다 되어가는 어른둘과 십대 초반의 아이들의 놀이…지금 생각해 보면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와의 부재가 비일비재한 한국 아이들에겐 조금은 낯선 모습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운동을 싫어하였던 아이들도 점점 운동 신경이 늘고 승부욕 가득한 울 아들 건형인 오히려 욕심을 줄이고 즐기는 마인드로 바뀌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절 우리집 단체 활동의 복병은 처음엔 예상치 못했던? 우리들 큰 누나(언니)였다.
그녀와 함께 밴쿠버에 오기로 결정하고외할머니께 인사드리던 날…할머님께선 내 손을 꼭 잡으며 “우리 아이가 잘 삐치는데요.잘 좀 다스려 주세요~”
그 때 나는 할머님의 말씀에 ‘이상하네~잘 웃고 정 많고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말씀은 언제나 뜻이 있는 법…
하루에도 몇 번씩 토라지는 모습에 내 골머리가 지끈지끈. 공에 맞았다고 울며 토라져 막 가버리고, 자기 물건 빌렸다고 토라지고 진짜 아무일도아닌일에그럴때마다 가슴이 철컹철컹…지는걸 싫어해서 운동을 할 때마다 야단 맞는 건형이와 늘 토라지는 우리집 큰 딸 ~ 두 B형의 쉽지 않은 성격은 처음엔 걱정에서…지금은 내가 가장 믿는 우리 집 기둥들이 되었다.
이 또한, 함께 울고 웃으며 대화하고, 늘 정이 쌓여가고그들의 성향을 인정하였기에 가능한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일 주일을 공부하면 우리들의 아빠 제임스가 치르는 영어 테스트 시간이 있었다.
한국에선 경찰관 이었던 아빠에겐 또 하나의 달란트인 수능 영어 과외선생님이라는 또다른 직업이 있었기에,아이들에게스피킹이나리스닝을 가르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단어를 암기 시키고 문법을 가르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던 일이었다. 이 곳에서범죄학을 공부하던 그 시절 grammar(문법)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그였다.ㅋ~
우리아이들도 여느 한국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영어 사교육을 받아왔던 아이들이었다. 어린시절 영어 유치원부터 동시 통역반이라는 사교육 학원까지 이력들이 나름 다양하였다.
유일하게아들 건형이와 우리 집 예쁜이 혜란이만이 특별한 사교육없이 이 곳에 왔기에 이 시간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기도 했었을것이다. 쑥스러움 많고 자존심이 강한혜란이는 시험 볼때마다 눈물이 어찌나 많았던지. 아이들보다 몇 개씩 적게 맞으면 속상해했고 좀 더 잘 하고 싶은 욕심때문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릴때마다 제임스 아빠는 뒤에서 몰래 조금씩 힌트를 주고 통과 시키는 비밀스러운 일도 있었으니…피식 웃음이 나던 그 때였다.
 
아이들의 6,7학년 시절은 어쩜 빠른 아이들에게는 질풍노도의 시기인 한참 예민한 행동과 감정을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 가정 또한 모두가 이 때의 아이들이기에 피해갈 수 없었던 크고 작은 소란함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아이 정도가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작은일에도 예민했고 그 때부터 한국에서 가지고 온 새 가구들이 하나씩  망가지기 시작하며 민감함과의 전쟁이 시작 되었었다. 적응을 위해서는 한국에서의 취미 활동들 중 몇몇(예를 들면 컴퓨터 게임이나 만화책과 웹툰 등)은 학습 집중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기에 통제가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대학시절 아동 발달학이나 청소년 심리학에 대한 교양 과목을 공부했던 기억을 떠 올려보면 이러한 활동에 중독이 된 경우엔 암기력과 집중력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었기에 어른인 우리와 아이는 함께 노력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어도 했었고 때때론 물건을 던진다던지부순다던지하는 행동들이 나타났고, 이것을 참아내고 이겨내기에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인내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다행인 건 내가 부모였다면 어쩜 이 고비를 넘기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부모는 욕심이 현실보다 앞서기에 아이를 객관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 때에 우리와 더불어 곁에서 함께 참아주고 위로해 주던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이러한 세월이 밴쿠버에서 마음과 인성이 제일 예쁜 우리 아이들(대학생이 된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함께 나들이를 다니고 동생들을 잘 리드하며 어른을 공경할 줄 알기에)을 있게 하였고~~내가 지금도 아이들을 모른척 할 수 없는 이유이며 인연인 것 같다.아이들의 좋은 길잡이가 되는 일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며 인내하고 기다리기라는 말처럼 오늘의 삶을 임할 수 있기를 부모님들의 대표로서 간절히 구하여 본다.
 
우리 아이들의 TIP
2017년 9월 시작을 앞두고 있는 어린 자녀가 있다면, 자신들이 가야할 학교의 계획을 살펴 보는 것이다. 시즌마다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배구,농구,트랙 등)를 알아본다든지, 참여할 수 있는 경험도 미리 해 보며한국 학생들이 많이 찾아가는 학원 교육보단 학교 생활에 흠뻑 젖어보기를 추천한다.궁금한 점들도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과 소통하며, 학교를 즐겁게 여기는 것이 결국은 성공적인 유학의 시작이 되는 것 같다.
JNJ 홈스쿨 원장(www.canbce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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