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Cay)이 반달(half-moon)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프문 케이는 작은 무인도. 리틀 산살바도르라는 공식명칭 대신 하프문 케이로 잘 알려져 있다. 크루즈처럼 큰 배가 정박할 시설이 없어 거룻배(tender boat) 2대가 한 번에 50-60여명씩 승객을 실어 나르며 선박과 해안을 왕복한다. 7층 선실에서 내려다 보니 물방개처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한다. 3천여명 가까운 승객을 실어 나르다 보니 바쁘기도 하겠다.
하프문 케이는 영연방인 바하마군도를 형성하는 700여개 섬 중의 하나이다.  2,400에이커의 이 무인도는 원래 노르웨이크루즈라인이라는 유람선회사 소속이었는데 홀랜드아메리카라인 크루즈사가 1996년 12월 미화 6백만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그 중 50여 에이커를 리조트로 개발하여 홀랜드아메리카, 코스터, 카니벌, 프린세스 등 자매회사 크루즈 운행회사만 정박하도록 하고 있다. 다른 크루즈 운행사는 하프문케이를 여행일정에 넣을 수 없다. 카니발 글로리 선박은 자매회사 소속. 그래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휴양지중 하나를 방문하게 된 것이 다행이다.
하프문 케이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크루즈사 마다 정박지관광(Shore Excursion)상품을 선전하는데 이 조그마한 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니 다양하다. 수영, 일광욕, 해변산책, 스쿠버다이빙, 스노클링, 수상 제트스키타기, 자전거타기, 심해 낙시, 모터보트에 연결된 낙하산을 타고 즐기는 페러세일링, 말 타고 해변달리기, 보트나 카약 타기, 바닥이 투명한 배를 타고 바닷속 구경하기 등 다양하다.

수영. 아내는 잘 하는데 나는 물에서 맥주병이다. 일광욕. 강렬한 카리브 해의 태양빛을 감당하기에는 내 피부가 너무 연약하다. 슬그머니 피부암에 대한 걱정도 드니 ‘땅 꺼질까 한숨도 깊게 쉬지 못하는’내 성격에 무리다. 해변산책. 그건 괜찮다. 아내와 나는 우유분말처럼 부드러운 백사장을 걸으며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카리브 해를 함께 바라본다. 때로는 백사장에 아내와 나의 이름을 써놓고는 밀려오는 파도가 이를 지우는 모습을 지켜본다. 삶의 거센 파도가 밀려오면 아주 잠깐 존재했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전혀 우리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리고는 처음처럼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쓰리라. 이 세상이라는 해변에서.
그 밖의 여러 항목들은 나와 무관하다. 왕성한 체력을 요하는 ‘액티비티’들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그래서 젊을 때는 도둑질만 빼고 다 해 볼 일이다. 늙어 기력 빠지면 추억이라도 건질 수 있게. 내게는 어릴 때 수영배우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추억이 있다. 그 이후 ‘안되면 되게 하라’는 신조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라는 좌우명을 더 지킨다. 궁색한 변명이지만.
해변가 산책을 한 시간여 하다 보니 배가 고프다. 애초에 배 안의 식당에서 햄버거를 싸 올까 했으나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현지 음식을 맛보는 것. 좀 비싸더라도 추억의 미각을 남기는 것도 좋은 일. 그래서 그냥 내렸는데, 다행이 해변에서 가까운 대형 식당에서 햄버거, 핫도그, 열대야채 샐러드와 찬 음료수를 제공한단다. 대중음식이니까 비싸지는 않겠지 하면서 냄새를 따라 가서 줄을 섰더니 돈을 받지 않는다. 공짜란다. 크루즈 회사에서 제공하는 점심이란다. 잘 입지 않는 바지 세탁하려다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린 $100짜리 한 장 발견한 기분이다. 원래 내 것이었는데도 새삼스러운 느낌. 철판에서 지글지글 태우고 있는 햄버거 패티 냄새가 더 후각과 미각을 자극한다.
식후, 섬 안쪽의 산책로에 접어든다. 걸어야 소화가 된다. 크루즈를 다녀오면 모두 살이 쪄서 온다. 하루 세끼 배 안의 식사는 산해진미인데 제 소화능력도 생각 못하고 양껏 가져다 먹다 보면 삽시간에 임신 5개월정도의 배불뚝이가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날씬한 사람들은 채소나 과일, 또는 유산균음료를 먹고도 체육시설에 올라가 열심히 운동한다. 한 접시면 족할 뷔페음식을 서너 접시 담아와서 결국은 반도 더 남기는 무식한 사람들은 모두 배가 나와있고 게을러 보인다. 그것도 동서양을 막론, 별반 차이 없다.
햄버거 패티가 너무 타서 질색을 한 아내는 핫도그 한 개, 요구르트 한 병, 열대과일 두 세 점을 집어 들었지만 나는 양이 차지 않는다. 해서 소갈비, 닭갈비 바비큐를 몇 점 내 쟁반에 얹었는데 먹고 보니 늙어가는 내 위장이 아우성을 질렀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집에서는 육류섭취 잘 하지 않았잖아. 당신 위장이 마냥 젊은 줄 알아? 제발 날 좀 괴롭히지 말아줘. 항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섭취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위장에 부담이 덜 갈 터이니.
열대식물군락 사이로 난 산책길에 팻말이 하나 보인다. 작은 섬에서 무슨 이정표를 세웠나 하고 가까이 가 보니, 여름 평균온도 섭씨 27도에서 32도, 겨울평균 21도에서 27도라고 섬의 평균온도가 적혀 있다. 사철이 봄이요, 여름이다. 추위걱정 없이 살기에 참 좋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아래 적힌 글을 보니 멈칫해진다. 6월 1일부터 11월 31일까지 허리케인 시즌.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천국에나 있겠다.
점심식사를 하던 곳에서 북서방향으로 5분쯤 걸어가니 커다란 목선 한 척이 눈에 보인다. 아하. 이게 하프문 케이 박물관이구나 싶어 들어가 보니, 입구에 ‘바위섬에 있는 모건 선장의 술집(Captain Morgan on the Rocks island bar)’이라 적혀 있다. 선체길이 약 30미터, 복층 갑판, 돛대 세 개를 갖춘 이 배는 금방이라도 해변의 은 모래를 미끄러져 나가 바다로 향할 듯 하다. 350여년전 영국 사나포선(적국선박을 공격할 수 있도록 정부로부터 허락 받은 민간선박)선장으로 해적이었던 웨일즈 태생의 헨리 모건은 카리브해 연안을 탐험하고 정복하여 영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다.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칭호를 받게 되었고 자마이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활약상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만드는데 영감을 주었다.

심지어 검은 수염의 해적선장 모양을 한 알코올도수 35도의 럼주(캡틴 모건 럼)도 개발되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주로 판매되고 있다고 하니, 해적이었다 귀족이 되었던 망자의 삶은 여한이 없겠다. 그렇다면 술집이름을 ‘얼음 넣은 캡틴 모건 럼주(Captain Morgan on the Rocks)를 파는 섬의 술집’이라고 해도 말 되겠다.
모건 선술집에서 다시 해변으로 몇 발자국 내려 오니 초가지붕 옆에 ‘나는 여기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I wish I could stay here forever)’는 입간판이 보인다. 다른 선술집의 이름이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캡틴 모건 럼 한 잔 마시면 세상 다 잊어버리겠다. 대개 인간의 갈등과 고뇌, 좌절과 상실감은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법. 세속의 관계를 떠나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나날이 봄날인 작은 섬에서 술 고프면 술 한잔, 배고프면 밥 한끼 먹으면서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나도 영원히 거기 머무르고 싶다. 그러나 유람선 뱃고동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해변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관광객으로 하여 을씨년스럽다. 절대고독을 느끼는 섬. 관리인들만 남아 다음 손님들을 맞을 차비를 하겠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시 ‘귀천’ 에서)’. 그리고 우리는 오랜 항해를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가리.
내 영혼의 즐거움을 잠시 맡겨두고 떠나는 섬. 20여명의 하객이 들어갈 수 있어 작은 결혼식이나 특별한 기념식을 할 수 있는 로맨틱한 섬 안 작은 교회(Bahamian Church)의 종소리가 울린다. 환청일까? 그대 영혼은 여기 작은 쉼터에서 평안한 안식을 취하리니 삶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이를 기억하라고 속삭인다. 돌아가는 텐더 보트에서 바라보는 첨탑 십자가. 자꾸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내 영혼만큼은, 영원히 그곳에 머무르고 싶다.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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