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가족 카톡방에서 연신 소리가 울린다. 아이들의 재촉이다. 아빠의 골프장 출입, 직장,식당 가는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다. 모두들 걱정 하면서 나 더러 잘 설명해서 집에 있게 하라는 것이다.

과연 내 맘은 어떨까?
설명하고 가르치고 따지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이다. 아이들이 말하기 전에 이미 뉴스나 페이스북에 도배를 하고 있는 그일을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었겠는가?

과연 남편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묵살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안색이 싸~악 변하면서 짜증을 내고 나가 버렸다. 결국 빌미를 제공하고 쫒아낸 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남편은 왜 가족들이 원하고 자신이 봐도 심각하게 되어가는 위협적이고도 답답한 이런 사정에서 그 들의 걱정을 받아들여 집에서 놀 수는 없다는 말인가?

놀 줄 모르는 사람들!
놀 줄 모른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제동이 걸렸다는 것이 싫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며 하기 싫은 일을 하라는데 대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럴땐, 어른이, 아이가, 당신이, 남편이 아빠가,그럴수가 있느냐고 하면 방어벽을 치고 반감만 생길뿐이다.그리고 남편에게 식구들이 만든 틀에 맞추기를 바라고 그게 옳고 맞는 일이라고 밀어 부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만족도 못하면서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걱정하고 불안해 한다.
남편은 요즘처럼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집에서는 뭘 해야하는지를 잘 모른다. 때마침 요즘 와서는 스마트폰을 노리개로 삼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고 밖에서 같은 취미생활을 가진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에게서 분리되고 고립될것 같은 불안감에 힘들어 하고 있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30센티미터 반경내에 남편이 있다. 어떻게 남편과 함께 놀수 있고 뭘 할 수 있는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치약 뚜껑부터 서랍문 닫는 일 변기에 물 내리는 일까지 사용 후의 뒷처리가 안되는 사람에게 좋은 말로 부탁하지 못한다. 언짢게 지적하고 명령하고 싶지만 억지로 눌러 놓을 때가 많다. 나 역시 남편과 함께 놀 줄 모른다.
아이들을 키울때도 어릴때는 씻겨주고 밥먹이고 취학을 할때는 공부시키는 일이 전부였다. 막상 애들이 다 자라서 보니 함께 놀아주고 이야기 나눈 추억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당채 놀줄을 모르고 부모 형제들 보다는 친구를 찾아 놀이를 찾아 나선다 또한 정리정돈을 하고 자기들이 해야하는 일도 잘 모르고 시집가고 장가드니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가운데 관계의 범위는 넓어지고 놀이를 통한 학습이나 놀이가 공부보다 우선순위라거나 놀이 하듯이 가사노동을 배우고 본 바가 없기에 급기야 성격차이다, 사랑이 없다는 불협화음이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 역시 놀줄 모르는 사람이기에 아주 가까운거리 한 공간에 남편이 있지만 서로에게 유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익숙해있던 나의 습관 즉, 따지고 설명하고 충고하는 잔소리에서 해결을 보려고 하고 있었다.

‘왜? 나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고싶고 나도 불안하고 걱정되기 때문에….
또한 내 뜻에 따라주지 않는 남편을 통제하고 싶어서….’

왜 ?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면 불안하고 걱정이 될까?
아픈 것 즉 고통이 두렵고 싫다. 나와 가족 모두의 일상이 멈춰지고 남편이나 자녀들이 아프면 내가 힘들어 지니까 불안하고 걱정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파서 걱정이 되고 힘들다는 것은 제일 먼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내가 힘들어지는일이 먼저 내 생각을 지배해 버린다.
“난 어떻게 되고 어떻게 해야하지?”, 혹은 “난 그들을 도와줄 여력이 얼마나 있는가?” 한마디로 도와주기 힘들다는 나의 본 마음이 있고 더 결정적인 일은 죽기 싫고 힘들기 싫다는 일이다.

이것이 내 마음의 현주소이다
시집가서 애기 낳아 잘 기르면서 살고 있는 딸이 무척이나 고맙고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큰 딸이 너무 사랑스럽고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자신의 몸조심을 스스로 하고 있는 아들이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비가오는 날 임에도 골프장에 꼭 가야하겠다고 나서는 남편도 오늘 무사함에 감사할 따름이고, 이 모두는 내가 나를 위하여 건강해 주기를 원하는 내 바램에 응답해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걱정과 불안은 무엇이며 왜? 놀 줄을 모르는가?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진행중인 일들이다. 불안하다는 것은 분별함에서 나오고 그 분별이라는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은 일을 있는 일처럼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맞춰지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그러기에 이 분별에서 오는 모든 생각은 그야말로 허상이란 것이다.
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기에 이 분별은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해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며 물의 물결이 이 모습 저 모습으로 일어날 뿐이듯 우리 마음의 생각도 그와 같이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음에 해악이 되는 일이 있다면 불안하고 나쁘다고 여겨지는일이 있으면 내 삶에 장애라는 틀을 지워놓고 더이상의 긍정과 희망의 문을 닫아버리는 방점을 찍어 버린다. 이것은 “난 계속 불행하게 살겠소 “하는데에 큰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장애라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붙들지 않으면 생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물의 물결이 이미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기에 지나간 그 물결을 다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붙들지 않고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도 아무일 없이 어떤 손해도 보지않고 잘 살수 있는데도 이 간단한 일을 실행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왜 일까?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분별 망상 때문에 그냥 지나가버린 지금 있지도 않은것을 다시 만들어 붙들어 메어놓고는 괴로워하면서 또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고 그 설정과 기대에 부응이 안된다고  불안과 걱정을 친구삼아 살아가고 있다.

오늘,지금 이순간도 누군가가 못마땅하고 나의 틀에 맞추어지지 않고 그럼으로 인하여 보기싫고 미운 그 상대와 어떻게 놀 수 있을까? 그 상대는 나 자신일수도 있고 타인도 포함된다. 그것은 반경 30센티안에 있는 남편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데로 골프장도 가지않고 식당가서 밥도 먹지않아야하는 틀을 정해놓고 기대하는일이 나의 희망사항이고 망상이란 것을 깨달았을때 분별과 불안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병이 낫는다고 해도 내가 힘들거라는 걱정은 아직 오지도 않은 허상을 잡고 씨름을 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됨으로써 말로는 상대를 위한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 남편이 아픈 일은 내가 힘든 일이라는 솔직한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상대방이 나의 말을 따라줄 때만이 내가 편해질수 있다는 착각임을 알아 챌 수 있을 때 이 모든 불안과 걱정이라는 번뇌는 멈춰질수 있고 더 이상의 간섭으로 상대를 옭아메지 않으며 걱정과 불안함으로  끄달려 가지않고 살 수 있다.

생각과 분별의 습관은 어떤 힘겨운 실제상황보다 생각이 난무하는 분별의 시간때문에 상황을 더 궁지로 몰아갈때가 많다. 그러기에 이것만은 하지말자  라는것이 생각과 분별에서 오는 허상을 자기자신이라고 자리매김 하면서 자신을 쥐어짜고 비판하며 생체기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걱정과 불안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어있고 그 마음으로 누군가와 함께도 놀 수 있고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마음자리가 생기게된다. 그렇게 되는 마음밭은 분별이라는 생각이 한번 “뚝” 끊어지는 체험이 있어야 하고 그 마음은 더 이상 물러서지않는 불퇴전의 지휘하에 머물수 있다.

남편이 집에 있기를 원하면서 집에 있을수 없게는 만들지 말아야 겠다는 우스운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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