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5_111607_1040나에게 자랑하고 싶은걸 얘기하라면, 사랑하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은근히 낯을 가리는 편이고 빈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친구들 숫자가 많은건 아니지만, 나는 내 친구들이 혹시라도 어려운 일을 당한다면 내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태서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갈거다.
 
이세상에서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은 남편이고 내 1번이다. 남편을 제외하고 이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뽑으라면, 대학교 1학년때부터 친한 내 삼십년지기 친구 혜옥이다. 우리부부가 캐나다에 이민 와서 알게 된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하면, 케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우리 부부 이민생활의 중요한 고비마다 함께 있어준 고마운 친구이다.
 
2001년 여름, 남편이 랭리에서 피씨방 개업을 하려고 가게 리스를 하고나서 renovation을 하려고 했을때, 건물주가 본인 입양딸의 동거남인 케빈을 소개시켜줬다. 그는 아이리쉬 피가 섞여 붉은 톤을 띤 갈색머리의 30대후반 백인인데, 목수인 아버지를 도와 12살때부터 목수일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후부터는 계속 이쪽 일을 본업으로 해왔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만에 drywalling과 painting, ceiling tiles, 전기 outlet들을 마무리해서 우리는 예정대로 비즈니스를 개업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랭리에서 월세를 살고있었고 나는 임신6개월차에 직장을 다니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이라 그의 공사비가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단 1불도 깎지 않았다.
2003년 가을, 주변에 새로운 피씨방이 들어서는 바람에 남편의 피씨방이 망해가고 있었다. 남편은 바로 옆자리에 술집을 오픈하면 비즈니스 둘다 살릴 수 있고 공사비 일부를 렌트비에서 빼주겠다는 건물주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서 피씨방 옆자리의 빈 공간을 리스를 한후 케빈을 통해 renovation을 했다. 말수가 없고 잘 웃지 않는 그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말로 여기는 위치가 나쁘다고 했지만,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2001년 보다 경제적으로 더 힘들었지만, 공사비는 카드빚을 내서 전부 지불했다. 피씨방은 그해 11월30일자로 결국 문을 닫았고, 술집은 그 이듬해인 2004년 6월에 문을 닫았다.
 
2004년 8월, 카드를 긁어 3만불을 다운페이를 하고 법원경매를 통해 미션에 위치한 1에이커짜리 집을 12만불에 구입했다. 법원감정가가 15만불짜리여서 모기지가 $118,500이 나왔으니까 결론적으로는 내 돈 $1,500으로 집을 산 셈이었다. 마약중독자인 전 집주인이 마당에 트레일러를 놓고 살고 있었는데, 우리 부부가 집을 산지 한달이 지난 후에도 집을 나가지 않아 변호사와 통화를 한 후 답답한 마음에 케빈에게 연락을 했지만 사실 그가 도와줄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당시에 써리에 살고 있었는데, 생업을 뒤로한채 한걸음에 낡은 트럭을 몰고 와서 경찰을 부르고 전 집주인을 설득한 후 마당에 있는 폐차들을 주는 조건으로 towing company를 불러 전 집주인의 트레일러를 집밖으로 옮길 수 있었다. 케빈은 그 날 본인이 만든 smoked salmon과 와인을 가져와서 뒷마당에 모닥불을 피운 후 나누어 먹었는데, 그때 처음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고마웠다. 그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첫번째 집을 구입한지 4개월만에 5만불 오른 가격에 팔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부부는 재기할 수 있었다.
그후 그는 그전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나서 멕시코 아가씨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우리 부부와는 친구가 되었다.
 
2018년 초, 내 비즈니스를 하기위한 용도로 상업용 스팟을 구입했다. 남편이 바빠서 내 단골손님의 남편을 general contractor로 고용하여 building permit을 내주는 조건으로 $6,000+GST에 퍼밋신청비($500이 조금 넘었다)를 내기로 계약하고 계약금을 지불했다. 공사계약서는 빌딩퍼밋을 받은 후 작성하기로 했다. 처음 계약서보다 많이 추가된 총 $7,917을 지불하고 상업용 스팟 completion day로부터 6주가 지난 후에 빌딩퍼밋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공사대금으로 20만불을 제시했는데 proposal 한장 없었고, 게다가 공사대금이 부족하면 우리 집을 담보로 개인적으로 돈을 꿔줄 수 있다고 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청에 가서 알아봤더니 그는 내 공사의 general contractor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고, general contractor는 architect 자격증이 있는 그의 친구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Victoria day인 월요일 저녁에 케빈에게 전화를 했다. 나나이모에서 제법 큰 drywall company의 사장인 그는 대뜸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내 얘기를 듣더니 “Don’t worry. I will be there for you.” 그렇게 말하고 다음날 새벽 나나이모에서 출발하는 5시15분과 7시45분 페리 예약이 꽉 찼다며 나나이모에서 빅토리아까지 세시간을 운전해서 9시 페리를 타고 내 비즈니스에 낮12시 무렵에 도착했다. 남편과 케빈의 조언대로 내가 general contractor가 되어 만4개월 열흘만에 모든 공사와 시청검사들을 다 통과하고 비즈니스라이센스를 받아 새로운 장소에서 확장개업을 할 수 있었다.
 
이민초기에 다녔던 직장의 매니저가 내게 “It’s not what you know, but who you know.” 라고 했던 말이 인생을 살면살수록 크게 다가온다. 케빈을 비롯한 좋은 친구들 덕분에 돈 없이 이민온 우리 부부가 이만큼 자리잡고 살고있다고 믿는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이자 좋은인연이 되고 싶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음에는 공사이야기에 대해 적겠습니다.
 
 
**현재 New Westminster에서 『그레이스레이저 스킨케어』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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