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내가 이미 깨달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새로 무엇인가를 깨달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음 안에 있는 자신을 바로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들의 행복 찾기와 성불은 매우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깨달음과 행복은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행복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곧잘 등장하는 비유로 파랑새가 있다.
파랑새는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가 지은 동화극으로 어린 남매가 성탄절 전야에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나 자기들이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였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으로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주제를 형상화하였다 (6막 12장. 1903년 모스크바에서 초연)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왜 집 밖으로 나갈까? 집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일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눈은 원래 가까운 곳이 더 잘 보인다. 그런 이유로 원시(遠視)보다 근시(近視)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색안경을 쓴 것과 같이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보면 그 목적이 눈을 가리는 것 같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청춘들에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면서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고 조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가깝다고, 혹은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으로는 자신의 내면이 자신의 외부보다 더 가깝고 자신의 밖이 자신의 안보다 더 크지만 사실 자신의 안도 자신의 밖만큼 넓고 멀다.
단지 우리는 그곳을 여행하거나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밖에 대한 지식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모른다. 그곳을 몰라서 남에게 물어보거나 남이 알려주는 일도 생긴다. 아이러니다.
우리는 여행가나 여행기를 저술하는 작가가 아니라도 고단한 현실에서 지친 피로를 여행을 해서 푼다. 머리를 식히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신이 살고 있지 않는 곳을 가본다.
여행을 하면 몸과 마음이 즐겁다. 우리는 틈틈이 여행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하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서 돌아온다. 성불이나 행복은 집을 나가고 또 돌아오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외출한다. 외출은 여행의 시작이다. 집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새로운 자신과 만나고 자신을 새롭게 대해주는 남들과 새롭게 만난다.
여행은 어느 곳이나 어떤 계절이나 어떤 상황이나 모두 가치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가지만 자신이 원하는 상황에 매번 놓이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를 타보면 내가 여행하는 곳으로 귀가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여행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곳으로 여행 온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여행지에 불과하다. 그 여행지도 시간이 오래 흐르면 벌판이었던 곳에 마을이 들어서기도 하고 마을이 있던 곳에 숲이 조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불이나 행복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나와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발견한 자신이 성불한 자신이 되고 행복한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