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리를 시작하던 1988년 신림동 사거리의 양식당은 양식과 피자등을 파는 식당이었다. 지금도 많은 식당들이 그렇지만 홀에 비해 주방은 아주 작고 조리 기구라봐야 위에 버너가 있고 아래에 오븐이 있는 오븐 그리고 설겆이 하는 두 칸짜리 싱크대. 피자를 만들어서 오븐에 넣고 다른 오더를 만들다 보면 늘 피자를 태워 먹기 일쑤였다. 설겆이를 산처럼 쌓아 놓고 일단 주분부터 만들어 내고 주문이 주춤하면 설겆이를 하고 그러다 주문이 들어 오고 반복되던 나날들. 학원에서 요리를 배울때나 군에서 배식하던 취사병들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모습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숙식제공이 필요하던 때라 숙식제공이라는 조건에 혹해서 갔지만 화장실이 식당밖에 있고 창고 같은 방엔 화장실이 없었다. 아침에 사장이 출근 할때까지 볼일이 보고 싶으면 케찹통에 볼일을 보던 상황이 너무 싫어서 일주일만에 그만둔 그 요리를 시작하고 첫번째 잡은 일자리는 그렇게 평생을 가슴에 멍으로 남아 있다.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독서실 책상에 업드려 자거나 의자 아래서 꾸부리고 자던 노량진 시절이 나의 서울살이의 시작이었다. 독서실 비용조차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로 지하 주점 알바를 하면서 주방에 발도 겨우 뻗을 수 있는 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때문에 살 수 있었던것이 아닐까한다. 이태원 스탠드바주방에서 알바를 하면서 월급을 한푼도 받지 못하고 살벌하기까지 했던 이태원은 지금와서 생각하면 낭만이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슬리퍼 끌고 시장가서 마른 오징어와 마른 안주등 안주 거리 사서 들고 오던 그 시절의 나도 나였으니까?
서울프라자호텔 철도사업부에서 일을 하면서 후라이팬을 길들이는 법을 배웠다. 지금이야 논스틱 후라이팬이 나와서 계란 요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논스틱 팬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 무쇠로된 후라이팬이 크기만 달랐다. 작은 후라이팬은 계란 요리하는 것으로 서니 사이드 업, 오버 이지등을 만들기가 정말 힘들었다. 툭하면 늘어 붙고, 뒤집으면 터지고… 요리를 시작한 막내로 온갖 짐들을 메인주방에서 신역사로 옮겨야 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이 계단으로 짐을 나르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하면 짠한 느낌이 든다.
오물렛을 만들기위해 소금으로 계란 돌리는 연습을 수없이 반복하고 실제 계란으로 연습하면서 실패한 계란을 먹느라 힘들었던 날들. 후라이팬은 신성한 것이었다. 절대 비누로 닦으면 안된다. 절대 계란 이외의 것을 요리하면 안되었다. 불에 달구고 계란을 요리해서 코팅을 하고 후라이팬 닦는 솔로만 닦아야 했던 그 시절은 후라이팬을 모셔두는 것이었다. 후라이팬과 후라이팬 사이에 린낸을 깔아 부딪치지 않게 하고… 큰 후라이팬에 볶음밥을 하면 왜 그리 달라 붙던지. 오무라이스를 만들면 계란이 자꾸만 터지던 조리를 처음 배운던 그 시절, 열심히 살았다. 젊음이 불타던 시절이라 이주일씨가 캐피탈호텔에 처음 연 나이트클럽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출근하던 젊음이 넘쳐나던 우리들은. 커피숍주방만한우동코너에서 커피숍보다 더 많은 매상을 올리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야간대학의 진학과 젊음이 늘 충돌하던 시기. 피 끓는 청춘을 아낌없이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때 강남에 호텔에 이직하고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면, 아니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면, 이민을 하지 않고 한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한다. 이미 지나 온 길엔 수없는 이정표가 있다. 갈래길에서 늘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으로 지금에 내가 있다. 지나 놓고 보니 그 먼 길을 수없이 많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온 것처럼 힘들고 아쉬움도 많은 날들이기도 했다.
후회한다고 돌아 오지 않는 시간들, 그래도 다른 삶을 보면서 나를 반추해 본다. 잘 살았다고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은데 머리도 손도 텅빈 느낌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나의 모습이 가슴 거울에 비추듯이 저승길에 꼭 한 번은 본다는 자신의 지난온 발자취처럼 후회는 없다고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어깨를 토닥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