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상 $300> 조민우 /수필- 새벽 이슬처럼
늘 푸른 교회, Burnaby North Secondary School Gr.11

새벽의 이슬처럼
이번 봄방학을 맞아 나는 Vancouver Youth KOSTA라는 크리스찬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처음에는 친구의 권유로 가볍게 신청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칠백 명이 넘는 인파 속에서 너무나도 큰 은혜와 감동을 체험했다. 특히, 목청이 터져라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간절히 체험했다. 컨퍼런스가 끝나는 날, 저녁 늦게 차가운 고속도로를 지나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쁘고 뜨거운 마음은 얼마나 오래갈까? 과연 양은냄비 마냥 한순간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게 될까? 이러한 질문들을 하면서 나는 다시 세상적인 삶, 감흥이 없는 그럭저럭한 신앙으로 돌아갈까 봐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렇게 마음이 달아올랐던 것은 이번이 처음만은 아니었다. 나는 모태신앙인으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온갖 수련회는 다 참석하며 그곳에서도 여러 번 눈물 흘리며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이 점점 식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수련회나 모임들이 모두 막히면서 그동안 예수님을 향한 내 마음도 서서히 닫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번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배우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죄로 얼룩진 우리를 친히 씻겨주시고,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용서해주시고,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배웠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나 사랑하시는데, 정작 나는 세상이 좋아서, 이곳의 크고 작은 우상들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뒷전에 두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시면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나도 그 사랑의 만분의 일이라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 한켠이 시려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내 마음이 식지 않을까 겁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새벽예배에 부모님을 따라 기도를 하러 갔다. 이날은 이상하게도 이른 아침이지만 피곤하지도 않고 마음이 아주 고요했다. 평소와 같이 기도를 하려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미어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멈추질 않았다. 이때 나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을 달라고, 첫사랑을 회복시켜달라고 매달리는 마음으로 더욱 기도했다. 이 시간은 수련회나 컨퍼런스 때처럼 열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조용하고, 잠잠한 시간이었다. 내가 언제보다도 고요하게,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자, 하나님께서는 살며시 찾아와주셔서, 그 어느때 보다도 평안한 마음을 허락해주셨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따듯한 손길로 나를 달래주시는 것 같았다. 이날, 나는 확신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조용히 나아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1대1로 주님을 만나는 것, 진심으로 하나님께 내 마음을 전부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날부터는 하나님을 향한 내 열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친히 찾아와 주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베드로처럼 실패하고 지쳐서 신앙이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오래전 근심과 좌절에 잠긴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오늘날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넘어지고, 부서지지만, 다시 한번, 처절히, 예수님께 나의 사랑을 고백한다. 또한 나를 향하신 절대적인 사랑에 감사한다. 나의 기도가 뜨거운 불꽃보다는 오래 남는 온기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새벽의 이슬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믿음상 $200 > 최유나 /수필- 마가복음 9장 23절
밴쿠버 한인 감리교회, Clayton Heights Secondary school Gr.12

마가복음 9장 23절
“여러분은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까?”
매번 시기가 찰 때마다 목사님께서 문득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한다. “당연하죠.” 그리고 나의 대답이 시발점이라도 된 듯 뒤따라 들려오는 대답들이 귀에 들려온다.
“네.” “믿어요.” “그럼요!”
그렇다. 나는 ‘모태 신앙’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태(胎) 안, 다시 말해 태어나기 전부터 종교를 접해 신앙을 가지는 것. 그러니깐 자기 의지나 결정권과 무관하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전수받은 신앙을 모태 신앙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싫냐고? 아니, 난 오히려 감사한다. 기독교를 접하기 힘든 나라나 환경에 처한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엄청난 행운아거든. 그래서 가끔 믿음이나 신앙이 불안정할 때마다 저리 생각해보곤 한다. 물론 모태 신앙이 진심으로 좋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질문을 하실 때, “그래서 모세가 이 행동을 한 이유를 아는 사람 있나요?”
“제가 설명해 보겠습니다.” ‘모범 기독교인 답안지’를 외우기라도 한 듯 말이 술술 나오거나, 성경 대부분의 이야기들 중 듣지 못한 건 거의 없을 정도로 줄줄이 꿰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질문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천국에 갈 수 있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어.’ 그 질문만큼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질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 마음속 한구석에 맴돌던 어느 여름날, 나는 교회에 의해 단체 수련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찬양도 좋았고 설교도 여러 감명깊게 들었지만, 아니 들으려 하였지만, 딱히 마음에 와닿거나 하는 경험은 없었다. 심지어 대부분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의 기도회에서도, 나에게 성령님께서 직접 강림하시는 일은 없는듯 하였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짐을 풀던 때에, 수련회에서 나눠준 공과책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저 호기심에 펼친 페이지 중 하나가 내게 보여준 것은, 바로 마가복음의 말씀 중 하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마가복음 9:23) 그리고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여러 번 이 구절을 소리내 낭독하였고, 이내 내 머릿속에는 이 질문만이 맴돌았다. 과연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는가? 그렇다면 나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긴 하는가, 설령 있다고 하여도 그 믿음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믿음은 아니었는가. 아마 왜 천국에 갈 것이냐고 확신하냐 물어본다면, 대답은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겠지. 하나님을 믿으니까. 십계명을 지켰으니깐. 교회에 다니니까. 착하니까. 또는 삶에 최선을 다했으니깐. 하지만 이 대답들은 하나님께서 쥐여주신 근본적인 열쇠를 놓치고 있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가 천국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죄를 짓고 있겠지. 그리하여 심판받아 마땅할 우리를 벌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아마 지금도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 아니 스무 번째, 그것도 부족하다면 셀 수 없이 많은 기회를 주시고 계시겠지. 그렇게 죄에 물들어있는 우리가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거액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도 아닌, 바로 믿음으로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난 비로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아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 “여러분은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까?” 매번 시기가 찰 때마다, 목사님께서 문득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한다. “아멘.” 그리고 연이어서 이 말을 덧붙인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