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한인 이민사 칼럼 >

 

‘세계적인 천재 수학자 이임학을 기억하는 국가의 방식’. 이는 2015년 10월 30일자 경향신문 인터넷 판에서 발췌한 박은하 기자의 기사 제목이다. 이임학이 누군데?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 구태여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나? 라고 하면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린다. 나도 그를 전혀 몰랐다. 알 필요도 없었다. 내가 밴쿠버 한인 이민사를 추적해 나가기 전 까지는.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유일하게 밝혀진 밴쿠버 최초 거주자가 그이다. 문영석(전 강남대 국제학부 교수)의 ‘캐나다 이민연구’ p.161, 돈 베이커(전 UBC 한국역사학 교수)의 논문 ‘밴쿠버 한인-간략한 역사(Korean in Vancouver: A Short Story)’, 그리고 인터넷 사전 위키백과 ‘이임학’에서 쉽게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돈 베이커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임학 교수보다 먼저 BC주에 온 사람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 한국에서 온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중 명백하게 존재가 밝혀진 한 사람은 일본이름을 사용했던 중년 남자인데 1926년에 BC주에 와서 호프 주변의 한 농장에서 농부로 1934년까지 일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한국의 보성문화사에서 1987년에 발간된 한 논문집에서 프리츠 레만(Fritz Lehmann)이라는 사람이 쓴 ‘BC주의 한인 이민역사’라는 논문 중에서 발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고, 더구나 일제치하에서 왔기 때문에 밴쿠버 최초의 한인 거주자라고 하기는 곤란하겠다. 더구나 그는 밴쿠버가 아닌 호프에서 살았다고 하니.
이임학 교수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도 많이 있다. 그는 단순한 밴쿠버 최초의 한인 거주자가 아니라 UBC 수학과 교수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민 역사는 한국보다 훨씬 오래 되었지만 최초 중국이민자, 일본이민자는 모두 본국에서 살기 힘들어 캐나다에 돈 벌러 온 노동자들인 것을 감안하면 묘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아시아 이민이 본격화된 1960년대 초반까지 밴쿠버에 거주한 이민자들 중 유학생 출신이나 성직자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더 그러하다.
이임학 교수는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철판을 가위로 자르고 코일을 감아서 전기모터나 망원경을 만들었다. 수학 시간에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1939년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이임학은 수학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수학자가 무엇인지 몰랐고, 경성제대 본과에는 수학과가 없었다.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설립된 경성제대는 기초학문을 육성하던 일본의 제국대학과 달리 학생들이 가급적 실용학문을 익히도록 유도했다. 이임학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조선인 학생으로는 보기 드문 선택이었다.
대학시절 이임학은 ‘수학천재’로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다. 1946년 경성제대를 이은 국립 서울대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는 수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미 군정은 일제시대 9개 관립 단과대학을 통합해 국립종합대학을 만들고 이사회에 막강한 권한을 줘 운영하게 하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을 발표했다. 학생·교직원들은 이사회에 막대한 권한을 주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고 좌파 계열 학자들을 정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미 군정의 대학 정책에 반대하던 이임학은 몇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1947년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쓰레기더미에서 우연히 미국 수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를 발견했다. 잡지에는 당시 세계적 수학자였던 막스 초른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 이임학은 초른의 논문에서 저자도 “모르겠다”고 밝힌 부분을 풀어내 잡지의 편집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임학이 보낸 편지는 1949년 미국 수학학회지에 공식 논문으로 실렸다. 이임학의 생애 첫 논문이었다. 또한 한국인 최초로 해외 저명학술지에 실린 논문이었다.
1950년 6월 이임학은 서울에서 전쟁을 맞았다.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피란 갈 시기를 놓친 탓이었다. 이임학은 앞서 서울대를 사임한 뒤 김일성종합대학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방북 기간에 공산주의 북한사회에 반감을 느꼈다. 이때 이임학의 어머니와 누이동생도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에 남은 그의 가족은 전쟁 중에 북한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어머니가 “임학이는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둘러댔고, 그는 숨어 지냈다. 9월 서울 수복 후 서울은 살벌했다. 인민군 통치 기간에 부역한 사람들을 찾아낸다며 피란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시민들을 닦달하고 재판·처형하는 일이 연일 벌어졌다. 이임학은 1·4후퇴 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했다.
전쟁 중에도 미국공보원(USIS)에 가서 수학잡지를 살펴봤다. 해외에 나가 제대로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1953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 편지로 입학 허가를 받아낸 그는 마침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2년 후 이임학은 한국 국적을 박탈당하고 만다. 비자를 연장 받으려고 한국 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여권을 빼앗겼다. 이임학은 당시 “영사관 직원이 ‘당신은 한국정부가 필요로 하니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생각되어 여권을 없애 버렸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공부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압박이었다. 이임학은 밴쿠버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고 캐나다 정부로부터 영주권과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 북미에서 활동하며 군론(group theory)의 발전에 공헌했다. 1967년 그가 발견한 새로운 집합 2건은 ‘유한단순군의 분류’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름을 딴 ‘리군이론’이 만들어졌다. 미국 수학 백과사전, 영국 수학사전, 일본 이와나미 수학사전에도 이름이 실렸다. 가장 권위 있는 수학자들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디외도네의 저서인 <순수 수학의 파노라마(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도 역사적인 연구 업적 가 21인으로 기록되었다.
이임학 교수는 2005년에 타계했다. 귀국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불응하고, 캐나다 시민권자로 북한을 방문하여 학술활동을 한 전적 때문에 한동안 한국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는 ‘잊혀진 천재 수학자’였다. 한국내 수학자들은 그의 복원을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사망 1년 후 에서야 이 위대한 국제적 수학자는 한국정부에 의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였다. 2015년 한국의 미래창조과학부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을 발표했다. 거기에 이임학 교수의 ‘리군이론’등 기술성과와 개인사가 실리게 되었다.
비록 한국에서는 일부 수학계에서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밴쿠버 교민사회에서는 그를 최초로 밴쿠버에 거주한 선구자로서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힘들고 외롭고 어려운 타국에서 한국인으로 서의 위상을 우뚝 세우고, 세계 수학계에 한국인의 이름을 날린 자랑스러운 우리의 이민 선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민 선배들의 삶을 추적하고, 기록을 보존하고, 그들이 이룬 성과를 인지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뿐 아니라 미래의 주인이 될 차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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