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중 시인 및 구두수선공

 

Q. 가게의 의미

내가 내 가게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를 쓰고 신발을 고친다는 것의 만남을 사람들은 조금은 예술적으로 조금은 철학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민 1세대가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가 지금과는 퍽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의 부자와 그 때 한국에서의 부자는 크기부터 다르고 세계적인 위상도 다릅니다. 지금 이민자와 그 때 이민자는 그때그때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목적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로 왔다면 지금은 잘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로 오는 이민입니다. 나는 시만 쓰고 먹고 살 수 없으므로 호구지책으로 직장을 가진 것이고 구둣방은 적은 돈으로 가게를 할 수 있는 직종이었고 사람들을 덜 만날 수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 좋았지요. 100% 의도하지 않았지만 바라는 대로 됐다고 봅니다.

 

Q. 은퇴  생활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한 달에 1000불 가까이 보태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답게 사는데 그 정도는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달 생활비의 거의 4분의 3은 나라가 부담하니까 걱정이 없는 삶을 삽니다.

 

Q. 칠리왁(Chilliwack) 대한 애정

칠리왁은 나의 제2의 고향입니다. 이 곳에 산지도 40년이 넘었고 내가 한국에서 산 기간보다 깁니다. 이제는 한국에 가도 고향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가면 항상 좋은데 내가 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칠리왁에 왔을 때 나는 여기 젊은 이민자였습니다. 자전거를 상가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이곳에 오래 산 사람에 속합니다. 그리고 나는 노인이 됐습니다. 구둣방을 34년을 하고 은퇴할 때 지역 신문(The Chilliwack Progress)에서 나의 은퇴기사를 실었습니다. 구두수선이 사양길을 가는 업종이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고치지 않게 된 신발과 아무도 읽지 않게 된 시가 비슷한 운명 같습니다.

 

Q. 헤리테지에 가게가 남게  소감

은퇴를 하려고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게 안에 있는 기계였지요. 사양길을 가는 업종의 기계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돈을 들여 버려야 했습니다. 이 때 누가 조언했습니다. 칠리왁에 지역박물관이 있는데 거기 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물건이란 아무도 원하지 않을 때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버리는 비용은 그것을 가졌던 사람의 몫입니다. 노년이 돼서 집을 줄이려는 사람들도 버려야 할 물건이 고민이라고 합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 그리고 사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없는 물건은 버려야 합니다. 그 판단도 자신의 몫입니다. 지역박물관 자원봉사자들은 나의 가게의 기계와 물건을 걸던 벽(Slat wall)까지도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나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 뿐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가지고 간 기계와 물건을 어떻게 진열하였는지 와서 보라고 권했습니다. 나의 가게는 한 순간에 쓰레기에서 과거의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Q. 이민자들에게 한마디

요즘도 캐나다에는 이민자들이 옵니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답게 자신이 살던 나라와 지역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새로운 나라에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바꾸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일이 좋은 쪽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힘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왔다는 것은 캐나다 국민이 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던 변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 기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에도 자신에게도 손실이 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이 사람과 하고 생각은 다른 사람 하고 한다면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Q. 삶 그리고 행복에 대해

짧은 거리를 걷거나 긴 마라톤을 하거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이런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총 거리는 정해져 있지만 가는 사람에 따라서 그 거리가 길기도 짧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걷기 시작했을 때와 끝이 보이는 사람은 그 전체를 보는 것이 다릅니다. 나는 지금 종착지에 가까워 가고 있고 그래서 특별한 일이 생길 확률은 매우 적습니다. 과거가 길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대로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예측이 다소 쉬워졌습니다. 좋기도 나쁘기도 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점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내가 원하는 일처럼 오지 않을 수도, 빨리 올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역할이 있다면 하겠지만 그런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크게 상관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수두룩하니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거기서 찾으면 됩니다. 똑같은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이 아니기도 합니다. 행복이 아니라고 불행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나에 관한 모든 일을 가급적 내가 결정하고 나의 삶이 나의 주도하에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