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B 최자운

이방인

 

당시의 생각과 상황은 모두 배제한 채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만 남겨내는 것이 나의 기억법이다. 한국에서 장장 17년을 살았으니 그 중 비 오는 날이 꽤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 꽤 많은 비 오는 날을 맞이하면서도 비에 대해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왜일까? 분명 그날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깨달음이 있었을 텐데 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가? 이 모든 물음이 이방인이라는 키워드로 모여들었다.
지구 반대편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고 나서도 한국에서 맺은 인연들과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그야 기술의 눈부신 성장으로 손 아프게 편지를 적어 보내거나 할 말을 신중히 골라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누를 필요 없이 채팅창에서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도 낄낄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채팅창에서 시답잖은 농담거리로 함께 웃는 아이들과 ‘캐나다의 어떤 점이 좋은지’에 대해 진지한 담소를 나눌 기회는 많지 않다. 그리고 내가 그런 대화에 조금은 목말랐던 것인지, 지난 겨울 방학 한국의 모교를 방문했다. 외람되게도 내가 직접 만나 뵙기를 요청한 선생님은 담임선생님도 아니고, 재학 당시 따르던 국어 선생님도 아니고, 나의 유학 결심을 서게 한 윤리와 사상 선생님도 아닌 1학년 때 통합사회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었다. 예상한 것처럼 그 선생님도 캐나다에 대한 호불호를 먼저 물어왔고, 다음으로 캐나다의 어떤 점이 너와 잘 맞는지에 대한 질문을 주셨다. “아무도 저한테 간섭하지 않아요. 철저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에요. 그게 좋아요.” “너 약간 4차원 기질이 있구나.”
이곳에 같이 온 엄마가 호소한 어려움은 첫 번째로 언어장벽이 있었고, 두번째는 외로움이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겪는 외로움. 그럼 나는 외로움 따위는 느끼지 않는 타인보다 우월한 초인인가? 아니, 그것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다만 나는 다시 질문하고 싶다. 민족성과 정서로 통하는 그 소속감에만 기대면 외로움을 완벽히 지울 수 있는가? 또, 이방인의 본질이자 단점이 외로움이라면 무엇이 우리를 이방인으로 만드는가? 내가 내리는 이방인의 정의는 아주 오래전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래서 착한 거짓말을 해도 될까요, 안 될까요?” 짧은 비디오를 시청한 후 선생님이 던진 물음에 아이들은 모두 ‘안된다’에 손을 들어주었다. ‘된다’에 손을 들려고 대기하던 나는 뒤늦게나마 안 된다 쪽에 합류하여 같이 손을 들었다. “우리 1학년 2반 친구들은 착한 거짓말도 하지 않는 착한 친구들만 모였네요.”. 그 말에 당시 8살이던 나에게 두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착한 거짓말로부터 비롯되는 죄책감을 감내하기 싫어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왜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지? 저게 교육자의 참된 태도인가?’. 하지만 나는 가정에서 사회성 교육을 아주 잘 받은 사람이었고 그날 이후로도 현재까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수천수만 가지의 질문을 속으로 삼켜냈다. 다만 삼켜내기 아까운 것들에 한해서는 다시 한번 꼭꼭 씹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 혼란한 시기에는 삼켜냈어야만 하는 질문들이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만 나는 여전히 정중했고 공손했으며 그 탓인지 주로 내가 그 질문들을 분출하는 장소는 학교였다. 그 공손한 불손함을 당돌함으로 바라보는 선생님들이 계셨고 또 그것을 불손 그 자체로 바라보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그 결과물로 그 시절 내 생활기록부에는 ‘이성적이지만 감성적인’ ‘교우관계가 좋지만, 단체생활이 어려운’ 같은 모순되는 말들이 팽배하다.
그 격변의 시기에 자중이나 성찰 따위를 잊고 살던 나에게 또 다른 나는 마치 이제는 좀 성장하라는 듯 작은 시련을 선물해 주었다. 그 친구는 내 무릎에 작은 종양을 심었고 뛸 때마다 작은 통증을 유발하던 그 종양은 엑스레이로 보나 CT로 보나 MRI로 보나 암이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원인이 없고 치료가 어려우며 예후가 불량한 희귀암 환자가 되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재 내 몸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그 친구는 내 무릎을 앗아갔고 그 자리에 차가운 티타늄을 심어 넣었다. 그것은 나를 다시 한번 이방인 속성으로 밀어 넣었다.
통합사회 선생님은 나를 이렇게 회고하셨다. “암 치료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가발을 쓰고, 엘리베이터 키를 달고 자신의 병환을 숨기지 않으면서 명랑하게 학교에 다니는 걸 보고, 나는 네가 참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당함의 근원이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한다. “글쎄요, 저는 그게 제가 겁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무서우면 당당해지지 않을 수 없거든요.”
선생님께서 “자운아, 너도 상처받지?”라고 물을 정도로, 그리고 내 부모님이 자신의 자식을 강한 아이라고 칭할 정도로, 나는 약자의 속성을 가졌음에도 실상 타인에게 약자로 인식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럼, 실제로 내가 강한 사람인가? 아니다. 얘는 그래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듯이 기싸움을 시전하며 몰아붙이는 선생님 앞에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 숙인 적 없지만 교무실을 빠져나오며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쟤는 공부는 잘하는데 성격은 이상해”라는 말을 듣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곱씹는다. 또 내 모든 생각의 도식을 부모로부터조차 이해받을 수 없다는 통보에 “당연하다, 이해한다.” 답하면서도 가끔은 그런 기대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날들은 참으로 화창했다.
비 오는 날이면 몸 곳곳에 습기가 스민다. 육체적으로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고, 정신적으로는 잊고 살던 기억들이 수증기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그 수증기가 모여 때로는 주기적으로 앓아야만 하는 열병이 되기도 하고 그 병환 속에서 어떤 집단의 내지인이었던 나는 다시 이방인의 범주로 소환된다. 어떤 집단의 내지인인 나는 나 자신이 이방인이라 느끼는 이이고 이방인의 범주에 속하는 나는 내가 내지인이라 느끼는 이이다. 4차원, 장애인 뒤에 외국인이라는 또 하나의 이방인을 칭하는 수식어를 갖게 된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는 생각도, 살아온 환경도, 혹은 외모도 너무나도 다른 그야말로 이방인 중의 이방인. 다만 이방인들로 넘쳐나는 이 나라에서는 이방인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것조차 큰 문제가 되지 않기에 나는 머나먼 이곳에서 드디어 이방인이자 내지인인 내가 되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나의 결론을 ‘결코 내지인이 될 수 없는 자의 자기합리화’로 매도할지 모른다. 그 의견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삶에 한하여, 나는 안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내일도 문을 여는 학교, 사랑하는 사람, 내게 주어진 이름, 이 땅을 밟고 서 있는 나의 육신 따위의 것이 아닌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는 내가 하는 생각, 느끼는 감정. 그것만큼 뛰어난 불변성을 지닌 것을 본 일이 없으며 또 그만큼 온전히 나의 것으로서 역할을 해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내 삶을 지나고 있는 것이 내 생각과 감정인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아마 그 누군가보다 내가 정답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비 오는 날에 대해 특별한 감정과 느낌을 떠올리지 못한 까닭은 이방인과 내지인 사이에서 셀 수 없는 방황을 해온 내가 명백한 답을 정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생각과 상황으로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면 결론을 도출해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다 상세히 기억하고 또 그것이 내가 비 오는 날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머나먼 지구의 반대편에서 이방인이자 내지인이 되기로 결심한 나는 그 과정을 잊었다 하여 결론까지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번복의 여지는 열어두되,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앓은 수많은 열병과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했을 내 노력은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수많은 비 오는 날을 인고의 시간으로 보내왔으니, 이제는 이 비를 즐길 때가 온 것 같다. 우연일지 운명일지 모르는 캐나다 내의 첫 정착지, 이곳 밴쿠버에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