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청소년글짓기 대회 장려상 수상작

친구 

서유진  

한 살 두 살 살금살금 나이가 들면서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하게 되곤 한다.예전에는 그저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같은 반이라는 이유로,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로 쉽게 마음을 주며 친해졌고 순수하게 함께 어울려 다녔다. 

친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쉼 없이 울리는문자 알림 소리가 나를 지켜줬던 그때, 사진을 올리면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듯 달리던 댓글들이 자랑거리였던 한 때가 있었다.그때 나의 계정에 있었던 회원님과의 친구의 숫자는2000명이 넘어갔다. 

그렇게 내 옆을 빈틈없이 채워줬던 친구라는 존재들이 하나 둘 소홀해지고 멀어지며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여러 번 이였다.예나 지금이나 많은 친구들이 내 옆을 지켜주고 있었지만 모두와의 관계를 이어 나가지 못한 탓에 어딘가 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진학했던 학교에서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돌았다는 걸 알게 된 일이 있었다.나는 몇몇 애들과 함께 다른 학교를 다녔기에 더욱이 충격이었는데,그 소문을 내고 다녔던 당사자가 정말 친하게 지냈던,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친구였다.앞에서만 장미였고 뒤를 도니 날카로운 가시들이 날 향해 서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어느 순간부터나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애증의 관계가 되어있었다.내가 뱉는 말 한 마디에,행동 하나에 혹여나 상처를 받진 않을까,내가 의도한 바와 달리 받아들여 오해가 쌓이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내 자신을 숨기고 잃어갔다.한 쪽이 숨기며 유지하려 노력하는 관계는 위태롭더라. 

누군가 나에게 이때 온전한 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있었다고,그리고 지금도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외동이던 나와 달리 맞벌이하던 부모님과 3살 터울 여동생이 있던 친구. 고운 색깔의 꽃들과 파릇파릇한 입사귀로 봄을 띄운 화분들과, 유유히 유영하는 어항 속 물고기로 조금은 고요하고 조용했던 우리 집과 달리 품에 쏙 들어오던 하얀색 강아지와 파랑 앵무새,그리고 조금은 통통했던햄스터와 함께 복작복작 살던 친구.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달랐지만 그 속의 우리는 너무도닮아 있었다. 

우린 초등학교 동창이다.어쩌면 사회라고 할 수 있을 학교로 내딛었던 첫걸음을 함께한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하게 되었다.1학년 1반,같은 반에 배정되어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기억들을 회상했다. 2학년때 반이 갈라져도 매 쉬는 시간에 서로 찾아가고 찾아왔던 우리를,나이가 처음으로 두 자릿수가 되던 날에 함께했던 우리를, 칭찬을 받을 때도,혼날때에도,서로의 옆에는 서로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부모님의 권유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가 있었다.유학이 뭔 지,떠나는 게 뭔 지,아무것도 모르던 나이였지만 우리는 부모님의 메일 주소를 사용해서라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그때의 순수한 마음이 가득 담긴 글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두고두고 웃음꽃을 피워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다시 같은 상황에 서있는 지금 돌이켜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리움 없이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2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니던 초등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며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후의 시간들은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또 서툴게 연락만 했던 날들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행복했고 소중했다.우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문자로 서로의 기상 여부를 물었고, 현관문을 나서며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해 전화를 했었다.똑 닮은 교복을 입고 똑 닮은 검정색 가방을 메고 언덕을 내려오는 친구와 언덕을 올라가야 했던 나는 항상 언덕 중간에 있었던부동산 앞에서 만났다. 

그렇게 언덕 밑의 버스 정류장으로 여유롭게 떠들면서 걸어가다 연두색 버스가 휙 지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서초 15번이 크게 써져 있던 버스를 타야 했지만,둘 다 시력이 좋지 못한 탓에 확인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작정 뛰어내려갔다.그렇게 겨우 올라타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정장을 갖춰 입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넘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기에 바빴다. 

버스에서 내려 놀이터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학교가 보였다.벌점을 피하려 치마 밑에 입었던 체육복 바지를 끌어올려 치마 속으로 숨겼고, 손으로 명찰과 리본을 했는지 확인하며 교문을 통과했다.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한 층,두 층,세 층 올라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보였던 우리 반. 

같은 반이 된 걸 알았던 순간의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우리 초등학교에서 단 여섯 명만이 진학했던 중학교였기에 1학년 때 다른 반으로 갈라졌을때 정말 막막했기 때문이다.반이 적혀진 종이를 꼭 쥐고 살금살금 찾아간 반 앞에서 본 친구의 모습,그리고 반신반의하며 서로 바라봤던 표정,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지고 같은 답을 했을 때의 기분이 생생하다.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교실에 같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의지 되고 힘이 나던지.그 날 함께 집으로 걸어오며 이번 년도는 잘 흘러갈 것 같다고 말했었다. 

살을 뺀답시고 급식실에 가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 결국 매점으로 달려가 과자를 잔뜩 사 먹었던 일,숙제를 까맣게 잊어버려 교실 청소를 했던 일,나란히 리본을 매고 오지 않아 벌점을 받은 일,목련향이 깃든 학교 운동장을 거닐며 사진을 찍던 일. 

학교가 끝나고학원에갔다가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걸어오던 길.하루 온 종일 붙어있으면서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쉬지 않고 조잘대며 집에 다 와서도 아쉬워서 서로의 집까지 갔다가 헤어졌었다.봄에도,여름에도,가을에도,겨울에도,이를테면 계절에 취해 쉬지 않고 웃었던 나날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의 하루에 대부분을 채웠고,얼마나 소중한 지 모르고 보내던 하루들이 중학교 2학년이 끝난 겨울이 되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떠나게 된 캐나다로의 유학.가지고 있는 유학생활의 기억이 나쁘지 않았기에 별 고민없이 결정했지만 막상 일이 점차 진행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점점 막막 해져갔다.출국까지 남은 밤을 세어보며 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면서 내가 말하기를 미루고 미루다 결국 내 유학 소식을 엄마한테 전해 듣고서 나에게 물어보던 순간이 기억이 난다.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며 장난이지? 묻던 순간이. 

가장 친하다는 세 명과 만났던 출국 전 마지막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서로의 앞에서는오그라든다는 이유로 털털하게만 지내왔었는데,헤어지기 전 노래방에서 이젠 안녕을 흥얼거리다 울었던 친구들이 기억난다.실감나는 아쉬움에 씁쓸했고,후회됐고,한편으로는 이런 친구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렇게 헤어지고가장 친한 친구와 집으로 걸어갔다.이 날 집 옆 산에 올라간 기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 같다.어둡다 못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칠흑 같이 깜깜했던 산길을 손전등 하나에만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내딛고 올라갔던 정상에 누워 바라봤던 하늘.서울에서 별이 이렇게 많이 보였나 싶을 만큼 많았던, 짙푸른 밤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은 마치 우리의 앞길을 응원해주는 듯했다. 

캐나다에 와서 학교를 처음 갔다 온 날,누구보다 많이 생각났던 사람이 친구였다.여기저기 치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16시간의 시차가 무색하게 전화를 바로 받아주었다. 

지치지 않고 매일 하던 전화는 시간이 흘러서 고등학교를 진학하고,각자의 삶이 바빠지며 이틀에 한 번,삼 일에 한 번,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어갔다.서운함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바빴기에 서로 연락에 대한 재촉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실시간으로 통화는 못했지만 서로 시간이 날때마다 서로가 정반대의 시간에 남겨둔 문자에 답장을 했기 때문에괜찮았다.오그라든다는 말 뒤에 항상 숨겼던 진심을 일년에 한 번씩, 서로의 생일을 핑계로 써주는 편지를 통해 전했다. 

싸운 적은 고사하고 사소한 다툼조차 없던 친구라서, 다른 사람에겐 당연하게 하는 고맙다는 인사도,미안하다는 사과도,친구한테는 어렵더라.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는 생각에 넘어갔던 일이 많았다.친할수록 소중하게 대하라는 말을 항상생각하려 했다. 

여름이면 볼 줄 알았던 친구를 일 년이 넘고,이 년이 넘어가도록 보지 못하면서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많은 친구들과 한국 언제와?”, “우리 못 본지 오래됐네”, “한국오면 꼭 보자”, “보고싶어라는 말들을 이제는 주기적으로,의무적으로하며 친구 관계의 수명을 연장시키며 만남을 약속하는 친구들 중 다시 만났을 때 전만큼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친구가 몇일까 싶으면서,다시 만나기는 할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원히 초등학생일 줄 알았던 우리는 어느새 사계절을 수도 없이 겪으며 고등학생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놀이터를 누비며 소꿉장난을 하던 우리가진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직전의 나이가 되었다.지나온 나날들을 후회하진 않지만 누군가 다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돌아갈 것 같다.기억에 덧칠하지 못할 만큼 행복한 기억들을 다시 돌아가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10대의 절교는 서로의 잘못을 탓하며 등을 돌리는 것이지만 20대, 30대의 절교는 서로 소원해져 담담하게 멀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주변 언니, 오빠들에게 심심찮게 들었다.우정은 빨간색인 사랑과 달리 무색이라 변하지 않는 말처럼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비 내린 후의 안개꽃처럼 어렴풋한 기억이지만돌아보면 미소 짓게 하는 추억.다른 모든 것이 물음표여도 온점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가 진정한 친구 아닐까? 

올해 겨울이 오고 3년만에 만나게 되면 우리 많이 변했구나가 아니라 예전이랑 똑같네로 만나는 사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친구야,부족한 나와 11년 동안 친구로 함께해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워. 

우리만은 꼭 어른이 되어서도 변치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