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간밤에 눈이 내려 앙상한 소나무 가지마다 잔설이 얹혀있는데 다람쥐 세 마리가 그것들을 흐트러뜨리며 열심히 놀고 있다. 고즈넉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의 청명한 기운과 백 년 된 우람한 소나무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이 합하여 통나무 집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는 내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나도 이른 아침의 다람쥐처럼 늘 부지런하게 제 소임을 다하며 살고 싶다.
좋은 소식을 들으면 사람은 기쁘고 행복하다. 더구나 그 좋은 소식이 내가 열심으로 노력하여 기어이 꿈꾸던 것의 결과라면 더할 나위 없는 인생 최대의 기쁨인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쓰고 형제들을 따라다니며 읽어달라고 괴롭혔다. 오빠들은 아예 내 작품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막내는 너무 어렸고 유일한 독자는 바로 밑의 여동생뿐이었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그래도 나의 유일한 독자가 되어 공책에 연필로 꾹꾹 쓰여진 글들을 읽어주었고 평을 해달라면 나름대로 초등학교 2학년짜리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해 주었다.  나의 당선에 여동생이 제일 기뻐하였다. 고충을 함께한 동지는 두 배의 기쁨을 나누는 법이니까. 그 이후로 살아오는 내내 펜을 놓아본 적이 없다. 기쁨, 슬픔, 절망의 시간들을 거치면서도 늘 글에 대고 하소연을 한다. 삼십삼 년 전, 대학 학보사에 글을 써내고 처음 받은 원고료가 이 만원이었다. 그 원고료로 친구들과 학사주점에서 거하게 회포를 풀었다. 내 자신의 삶과 지인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가게 하는 원동력도 내가 글을 쓰는 까닭이다. 나 혼자만이 오롯이 독차지 할 수 있는 산과 하늘, 과수원 그리고 나의 터전, 백 년 된 통나무 집에서 글을 쓸 수 있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다섯 살 박이 딸이 장성하여 건강한 대학생이 됨에 감사 드리며 오늘도 딸을 위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끝으로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여러분 그리고 심사를 위해 수고하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섯 살짜리 꼬마인 레이첼은 두 돌이 되기 훨씬 전부터 제법 그럴싸하게 의사소통을 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희노애락의 감정을 의성어와 의태어를 동원하여 사용할 줄 알아 엄마인 내가 못당할 정도였다. 첫 돌이 지나고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책들을 장난감 삼아 보낸 시간들이 빛을 발하였다. 말은 하지 못해도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기 때 문에 글자를 일종의 정해진 그림으로 인식하였다. 책의 제목을 말하면 십팔 개월짜리 아기는 아장아장 걸어가 책장에 꽂힌 책을 정확히 빼들고 내게로 가져왔다. 레이첼은 일반 장난감보다도 온갖 책들이 가져다주는 무궁무진한 흥미로운 세계에 일찌감치 빠져들었다. 나는 언제나 육성으로 책을 읽어주었다. 책에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과 식물, 동물, 달, 별, 해, 구름 등 책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의인화시켜 제각각 다른 목소리로 성대모사를 해주니 아이는 더욱 재미를 느꼈다. 나의 어릴 적 기억으로도 그저 밋밋하게 들었던 이야기보다는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마다 다른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가 훨씬 더 재밌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나의 성대모사에 아이는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책을 읽느라 목이 아팠지만 아이가 너무나 재미있어 했기 때문에 나는 정성을 다하여 매일 책을 읽어 주었다. 책과 함께 부록으로 딸려온 콤팩트 디스크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사용할라치면 아이는 귀를 틀어막았다. 육성으로 직접 듣는 이야기에 이미 적응되어 기계적으로 녹음된 목소리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거부 반응이었다. 네 돌 반이 될때까지 레이첼은 텔레비젼이나 유아용 비디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무한 반복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 살면서부터 나 자신과 맹세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자녀에게는 반드시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적어도 인생 말년에 하나뿐인 자식과 의사 소통이 되지 않아 저물어가는 황혼을 바라보며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무리 빵에 버터를 발라먹어도 때로는 잘 익은 깍뚜기와 벌건 국물을 쏟아붇고 얼큰하게 설렁탕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울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할 의무가 내게는 분명히 있었다. 아무리 캐나다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통째로 캐어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모국어인 한국말을 잘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 이담에 커서도 타국에서 영어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동포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소금이 되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국말을 딸에게 가르친 일은 내가 한 일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존재한다. 삶의 시간들이 하고 싶은 일들로만 채워진다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싫어 미루고 포기한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어려운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씩 전진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나의 의무를 이행하였다.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했다.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두 가지 전부가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행해서 가르치기로 했다.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딸에게 한국말을 열심히 가르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한국에 살았더라면 당연히 한국어를 잘하지 않았을 것인가? 지나버린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힘들어도 꿋꿋이 나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다.

다섯 살짜리 꼬마인 레이첼의 한국말 솜씨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레이첼은 밴쿠버 청소 년 센터와 캐나다 영재교육 연구소가 주최한 2004년 밴쿠버 한인 청소년 스피치 콘테스트에서 당당하게 최연소자로 은상을 수상하였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이라는 주제로 제출한 원고가 본선 진출이 되었고 우리는 일주일정도 연습을 하였다. 참가자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첫 번째 순서로 연단에 섰다.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흘렀지만 레이첼은 나와 연습한 대로 열심히 연설을 하였다. 원고 내용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첫 순서이다보니 얼굴 곳곳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래도 어린 레이첼은 끝까지 자신의 의사를 청중들에게 막힘없이 전달하였다. 연설이 끝나자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과 박수를 받았고 밴쿠버 일간지들은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래글은 본선에 진출하여 레이첼이 연설하였던 내용이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다섯살이랍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놀라운 일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너무 많아요. 엄마가 부엌에서 일할 때 나는 훌륭한 조수가 되는 거예요. 엄마는 위험하다고 칼을 절대로 만지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두부를 잘 썰 수 있어요. 물렁물렁해 보이는 두부는 썰기도 쉬워요. 썰면서 가끔 집어 먹기도 해요. 맛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금방 알거든요. 나 는 엄마가 담가놓은 조갯살도 한 번 씻어보고 싶어요. 뿌옇게 우러난 물을 버리고 바락바락 주물러서 물기 없이 꼬옥 짜보고 싶어요. 또 굵은 소금을 훌훌 뿌려서 배추를 절이고 고추가 루 양념을 만들어서 배추 속에 한 켜 한 켜 박아 넣고 싶어요. 그렇지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엄마가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를 마시는 거예요. 근사한 향이 나는 커피가루에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유와 설탕을 넣고 막 휘저어요. 그러면 금방 까만색이 없어지고 다른 색이 나타나지요. 정말 무지무지 신기해요. 엄마 몰래 커피를 젓던 숟가락을 핥아먹다 들키면 엄마는 호랑이처럼 내게 달려들어요. 아이들은 큰일난다고 하면서요. 가끔 엄마는 커피 케잌이나 커피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하지만 나는 엄마의 진짜 커피를 마셔보고 싶어요. 얼른 커서 어른이 되면 커피를 마실 수 있대요. 그렇지만 그 때 가서는 맛이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다섯 살 때 꼭 커피가 마시고 싶거든요. 여러분도 우리 엄마처럼 정말 안된다고 생각하세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스레 청중들에게 물어보는 레이첼,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청중은 이구동성으로 예, 아니오를 대답하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가장 어린 참가자였던 레이첼이 대회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비로소 긴장했던 얼굴이 풀어지며 아이는 그들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앞으로 살아가며 정말로 자신이 원하고 소망하는 일들을 하며 꿈을 펼칠 수 있게 되기를 나 역시 딸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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