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Tube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가요가 귀에 울린다 .오늘이 가장 젊은날“““맞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입니다.
오늘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 , “나”를 만날수 있는 시간 안으로 함께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뜻이 있고 관심 있으신 분들 모두를 초대 합니다.

이 나이에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누군가가 물어온다면 “이 날 난 살아있고 이 날이 가장 젊은 날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합니다 ” 하고 말합니다. 젊은 세대들은 더욱더 흥미로운 일이고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생활 속에서 쉬어가는 쉼터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요.
젊은시절 , 어서 나이들면 맘이 좀 평온해지고 온유해지며 참을성 있게 되지않을까 싶어 시간을 재촉하며 그러면서 뭔가에 쫒기고 비교하고 시기하며 미움과 한편 먹고 나이 먹었지만 마음은 더 옹졸해지고 겉으로는 너그러운척 하지만 보상심리나 애착하는 마음은더 심해져감을 느낄수 있다.
나를 더 긴장되게 했던 일은 내 아이들이 나의 평소때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내 삶의 어떤 부분이 반영 되었을까? 두 딸은 나를 닮아 남자에게 사랑 받고는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기에 자기 주장만 강하고 그것이 받아들어지지 않을때는 투쟁하고 대항하며 이겨먹는 일이 능사라고 생각하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자주 화를 버럭 버럭 내고 있었다.

참 가깝하고 안타까운 지난날의 나의 모습의 재현 이었다. 그들의 골자는 자신의 잘못 보다는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고 자신들을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답이 나오지 않는 망상의 연속 이었다. 그러고는 그 생각에 묶여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퍼뜩 떠오르는게 없었다. 그냥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과 빈곤을 노래할 뿐이었다. 그것이 자기자신을 얼마나 가혹하게 헤치는지는 모르는체…..또 다른 삶의 반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나자신을 돌보지 못했다는 일이다.
다름아닌 다른 사람의 곤경을 동정 할수는 있었지만 축복은 기뻐해주기 보다는 시기와 비교와 부러움이 앞장 설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위의 단 몇줄의 문장의 일이었지만 몇십년을 돌아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내 아이들은 나의 장점 보다는 단점을 반영하면서 살아야 했고 나 역시 사는게 짐짝을 짊어진것 같이 무겁게만 느기면서 살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건전한 배출구의 활용함없이 꾹꾹 눌러 놓고 살면서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하는 잘못된 판단으로 병을 키워왔던 일이 큰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에 대한 질문 “난 어떻게 살기를 원하나? “ “뭘 바라나?” 그때 나의 마음에 떠오른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은 뜬금 없는 것이었다.

“난 사랑 받으며 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나의 삶에서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집착이고 소유 그것 이었다. 실상 내가 원한 것은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만이란게 가벼운 일은 아니고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그게 채워지지 않아서 생긴 일들이 하염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알고 나니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요청 할수있는 용기가 생기고 억울하고 원망하는 마음 전에 정작 내가 원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난 이것을 원한다고 그리고 이것은 내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말할수 있었다. 이것이 건전한 배출구를 사용한 첫번째 시도였다. 그 후 이 작업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어느날 부턴가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들의 장점을 이야기하게 되고 “고맙다 사랑한다”를 입밖으로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몸에 뾰로지(헌데) 가  생기면 금방 곪아서 일을 내는것 같지만 그렇지 않듯이 마음의 헌데가 난 것도 마찬가지이다. 난 변화되어 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지만 상대방은 아직 건전한 배출구의 사용함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풀리지 않은 맘의 응어리가 있을수 밖에…..
두 딸은 별로 존경 하지도 않는 부모를 가운데 두고서로 더 인정 받고 사랑 받을려고 줄달음치는 경쟁을 하고 있었고 내가 한 “사랑한다 고맙다”는 소리가 그닥 가슴에 진심으로 울리지도 않을 만큼 자신들의 삶이 답답했던 터라 큰 딸은 자기가 없는것만 이야기 하면서 자기 주변인물 즉 가족들이 도움이 않된다는 한탄만 늘어놓고 작은 딸은 어느날 차를 타고 가다가 가슴의 응어리가 폭발한 일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냥 들어주면 않돼? 위로는 못해 줄 망정 옳은소리 바른 소리 정말 듣기 싫어” 하고 말했을때 난 가슴에 뭔가가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난 무안하고 불쾌한 맘도 들었지만 그냥 다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딸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가 잘못했다” 행동하는 실전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딸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난 내 입에 자갈이 물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젠 옳은 소리 바른 소리의 완벽함 보다는 때로는 지적받고 단점을 말해주는 조력자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삶의 성취도를 키워가고 있다.

내 아이들의 삶의 주제는 결국 많이 갖고 싶어 투쟁하고 비교하며 그것을 밑천으로 특별해 지고 싶어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보여준 내 삶의 모습이었고 내 마음의 문제가 받아들여지고 인정될때 상대방보다 특별해져야 한다는 방어기재가 무너져 내림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건전한 배출구의 사용함에서 오는 헤택이며 자유함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데서나 쉽게 이작업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특정한 취지를 갖인 모임에 와서 일원이 되는 첫발을 내딛여야 한다. 내가 이 모임에 와서 처음에는 1 ;1 면담도 가능 했기에 지금도 필요에따라서 그 방법도 사용하고있다 처음 이 모임의 문을 열었을때는 한국사람을 만나면 사정을 하고 애원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나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음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힘을 실어 본다. 그리고 이 모임에 참석하신 한분 한분이 너무 소중하고 그 한사람의 힘의 영역이 가늠 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 분들의 삶이 여유로워지고 안정이 되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이 작업의 필요성이 더욱더 강조가 된다. 또한 각오도 새롭게 서게되고…..우리가 살아있다는 소재 하나만 가지고도 지금 시작 할 수있는 일이 많이 있다.
내가 지금처럼 자유하게 살 수 있고 희망의 보상을 받은 이유는 오늘 지금 살아있음에 내 삶의 말뚝을 박았기 때문이다.
어떤 도움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벼랑 끝에 섯을 때  난 살아있음 그 하나에 희망을 걸었다. 그 이전의 나의 삶은 살아있었으되 살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특별히 어렵고 힘들기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다만 간절함이라는 열망은 있어야 혔었다.
먼저 전화를 하게 되고 상대방의 목소리에 희망을 걸고 모임에 나오는것까지가 노력이라고 볼수 있는 일이다. 이 모임에서는 좋은 말만 하고 듣는 곳이 아니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큰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들을 내어놓고 누구의 말도 판단하지 않으며 그때 그 기분 느낌 생각을 그데로 빼거나 보태지도 말고 미화시킬 필요도없이 내놓는 것이다.
나의 이 경험이후 내가 알게 된 것은 희망과 긍정의 힘이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없이 살아온 삶의 결과물은 순간 잠깐 동안은 마음을 고쳐 먹는 일은 가능할지 몰라도 일관된 악순환의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계속 진행되어감을 볼 수 있었다.

다름아닌 가족병을 앓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가 이해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정직함의 결여로 사랑없이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고 그야말로 무늬만 가족이었다. 참 불편하고 깝깝한 삶이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이 모임에 참석하여 이 작업을 하게 되었고 제일 먼저 나 자신 비관하고 폄허하며 쥐어짜는 일의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일과 못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의사표현으로 필요이상으로 미안한 생각을 한다든지 눈치 보지 않는 삶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내가 못하는것 모르는 것을 시인하는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내가 이 작업을 몰랐을때 그냥 눌러놓고 거짓으로 포장하며 위장된 겸손 위장된 평화놀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 했던가?
문제가 한꺼번에 지뢰밭처럼 터진 그날 내 인생의 복도 함께 터진 날이다.
그날 터진 그 복은 난 이젠 사랑받고 살고 싶다고 표현할 수 있는 복이고 그 다음은 사랑하며 살아가기에 살아있다는 주제만으로도 희망을 보상받았음을 확신 할 수 있는 복이다.

그리고 나와 인연맺었다.

불편한 이웃에게도 먼저 손내밀수있는 나를 칭찬해  줄 수 있는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