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큰 결단이 내려졌다.”더 이상 같이 살수 없으니 헤어지자.”고 했다. 몇 주동안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마음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면 못 견뎌하고 괴로워하며 본인은 자책하고 주위 사람들은 원망하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억지 부리는 모습을 이번에는 봐주기가 어려웠다. 2주를 골프장을 나가지 않다가 이젠 멤버쉽까지 가입하여 매일 골프장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골프장 출입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일로 인한 생활의 불편함과 금전적인 과소비로 인한 어려움은 아랑곳 하지않아 보였기에 내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입을 닫아 버리는 무기보다 더 강한 흉기를 사용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남편은 어떤 일에 흥미가 있어 집착하게되면 적당히란 것이 없고 그렇게 할 수 없기에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 대두된 것이다.골프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수십가지가 넘는다.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이 듣는다면 납득이 갈만한 이유도 있다. 이번에도 그런 억지쓰고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원하는바를 밀어부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펜데믹의 이 시기에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서 사회적인 범위에서까지 영향을 미치는 데메지는 아주 크기에 이런 불협화음이 조성된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의 문제도 떠올랐다. 내가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 하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는 것과 옳다는 것, 그리고 나 라고 하는 그 생각이 나라고 주장하는 착각과 망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입장, 내가 원하는 것, 잘한 일 ,못한 일의 분별이 있었다. 구체적인 그 망상들은 내가 이혼을 하게 되면 , 주위사람들의 이목은 어느 부분에 집중이될까? 그들도 이런 일을 겪고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 나가지? 애들은 뭐라고 말할까? 나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생길까? 지금 쓰고 있는 칼럼을 계속 쓸 수 있으며 또 지금 하고 있는 (한인 고민방 모임)일이 가면을 쓰고 하는 일은 아닐까? 남편의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난 후 몇 분 않되는 짧은 시간안에 이토록 많은 생각이 지나가고 머물고 하였다. 거기에는 “내”가 있었기에 “남의 이목”이란 것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런 주문에 걸려서 살아가고 있음을 몰랐다.
나의 생활은 원만하고 좋은 표본이 되어야 한다는 설정과 그로 인한 자기관리에 마음을 쓰게되고 나는 너그럽고 친절하며 잘 참아 넘겨야 한다는 분별의 생각에 묶여져 있었다. 허나 자신의 마음의 상황판을 볼수 있고 인정 할 수 있는 그때부터 이미 치료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안목이 더 밝아지기를 바라고 산다면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곧 도래할거라는 희망과 믿음은 있다. 예전처럼 나, 나, 나를 부각시키지 않아도 아주 담담한 맘으로 위의 생각들이 오래 머물지 않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이런 담담함의 맘이 있기전에는 어떠했는가?
나의 후원자 선생님께서 어느날 말씀 하셨다 . 이분법의 분별에서 오는 갈등과 번뇌와 그로인한 고통은 마음이 아파서 생긴 병 이란걸 인정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날까지 잠깐은 괜찮은듯 하다가 또 괴롭고 고통스러운일이 지속될것이며 이 병이 나으려면 자신의 억울이와 분노가 시비가 되지않는 일이 될때까지 소나무 몇 그루 뽑아야 할 겁니다. 라고 그때는 그 말씀이 참 섭섭하고 부담스러웠다. 지금 이 체험을 하고보니 나에게 필요하고 꼭 맞는 말씀을 해 주셨구나 싶다.
그 갈등과 번뇌의 시간속에서 나의 삶은 이런 어려운일이 일어나지않기를 기도하고 바랐다. 그렇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났고 남들이 알까 숨기고 거짓말하고 숨어서 기도 했으며 힘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때도 있었지만 그때가 행운이고 행복하다고 느끼지도 못하면서 그 허상을 쫒아다녔다. 그 허상은 분별과 판단에서 오는 손해와 이익이 등장하는 일이었으며 그 판단의 선택으로 행복과 불행이 결정지워질거라는 착각속에 찾아헤메는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진곳이 바로 종교를 갖게 되고 신앙생활에 의지하게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생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맘이 좀 편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 종교에서의 의지함은 방향설정이 잘못되어 있었다. 본시 믿음이란 것은 주, 객이없고 원인과 결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거라고 이런 저런 방법을 제시하는 아주 주관적이고 이분법에 메여있었으며 내가 만들고 설정해 놓은 행복과 구원이 있었다. 신의 존재도 어떤 대상을 만들어 놓고 있었기에 내가 생각하는 그런 대상 또한 분별이었다. 그러기에 신의 뜻에 맞는 삶을 산다고 살았지만 힘만 들고 그 기도는 응답 없는 메아리만 될 뿐이었다. 그 잘못된 방향으로 찾아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자 더욱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자선을 더 해야하나 회개를 더 하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더 열심히 보고 ,기도하고 ,찬미 ,찬송 하면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행복할 것이고 구원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몇십년동안 하면서 살아왔다.
결론은 계속 찾아다니는 끈을 놓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발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자유롭지 못했고 생각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난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 사랑하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하라는 방법을 찾지 않는다. 분별에서 시작되는 미움이 사라지면 사랑은 자연히 드러나게 되어있었다.

이혼하자는 남편이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밉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게된 원인의 과거의시간과 이 시간 이후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분별과 계산의 생각이 그닥 오래 머리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고 있다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일로 인하여 입을 닫고 무언의 투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골프를 치지 않으니 매너도 모르고 그러기에 같이 치는 팀원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걱정되고 자신이 벌어온 돈이니까 이 정도는 할수있는 일인데 밖에 나가서 돈을 벌지 않으니 세상 물정 몰라서 집안에서 잔소리만 하고 있고 이 모든 일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 교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일축을 하는 그 일에 슬프고 무시당한 느낌 이었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모두다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판단과 원망은 아니었다. 얼마후 남편은 말했다. 홧김에 그런 말을 해서 미안 했다고…. 나역시 잘한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의도적으로 착해야한다는 의식에서 나온말은 아니었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깨달음은 곧 구원이며, 지금 이 마음! 이것! 뿐이다. 이 깨달음은 좋고 나쁨을 구별하여 좋은것은 취하고 나쁜것은 버리고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없는 것이다.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어찌 좋고 나쁨이 없을수 있겠는가? 다만 거기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2절까지는 가지않고 뚝 끊어져 버린다고 할까? 그리고 지금 바로 마음에 적용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맘은 항상 죽기전까지는 함께 달고 살기때문이고 그래서 바로 지금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 모든것에 걸림없이 효과가 녹아나는 삶을 살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하느님께서 아담에게”아담아!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다.
불교경전에서는 “호리유차 천지현격”이라했다.이 말은 티끌만큼 잠시의 생각으로 끌려가도 법계의 깨달음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로 엇나간다는 뜻이다. 이들은 스스로 되어지는 일이지 의식으로 되는일은 아니다. 의식으로 되는일은 변하기에 진리 즉 본성이라고 할수는 없다. 단지 그 본성을 확인하는 체험이 있을뿐이다. 구독자 여러분의 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