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가을이 뭐가 쓸쓸해? 그냥 그렇게 느끼는 거지. 한국 시골에 지금쯤 가면 말이야. 추수 끝난 논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허수아비나 탈곡 끝난 볏짚더미 보면 쓸쓸하지. 여기는 가을부터 비오면 여름에 누렇던 잔디가 살아나니 오히려 생기가 돌잖아? 그래서 여기 사는 거야.

선배의 말이 일리는 있다. 아는데 계속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은 지울 수 없다. 남자로써 이 세상에 나와 이룰 것 다 이뤘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철 밥통이라던 은행에 취직하고, 결혼하여 아들 낳아 가문의 대를 잇고,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고, 선진국에 이주하여 색다른 삶을 즐기고—
한인상가 밀집지역인 노스로드. 한식당 서라벌은 얼큰한 따로 국밥이 제대로였다. 고학으로 버틴 고등학생 시절, 대구 만경관 뒷골목의 원조 따로 국밥 맛을 잊지 못하는 나는 누구를 만나건 밴쿠버에서는 서라벌 식당이 우선이었다. 따로 국밥을 팔기 때문이다. 물론 원조를 따라가기에는 한참 멀었다. 숙주나물과 소고기, 대파, 무, 얼 갈이배추에 큼지막한 선지까지 갖은 양념을 곁들어 하루 저녁 푸욱 고아 다음날 아침식사부터 내어놓는 ‘원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새벽 신문배달을 끝내고 등교하기 전에 먹던 한 그릇은 몸과 마음을 모두 따뜻하게 만들었었다. 5년 연상의 대학선배 홍정길이 좀 만나자고 했을 때도 당연히 장소는 서라벌이었다.

원래 먹고 살만해지면 가을이 쓸쓸하게 느껴지고 그러는 거야. 강형도 그런 것 같은데? 그 나이에 아직도 월세 방에 살면서 청소일 하거나 야간경비 하는 사람들 많아. 보험 하니까 어쨌든 한국에서 하던 금융업무 하잖아. 밴쿠버 오자마자 매입한 주택도 두 배나 올랐고. 소프트랜딩 한 거야. 당신은.

금융업무? 그 말을 들으니 좀 씁쓸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뇌진탕이 걸려 죽거나, 혼자 크루즈 여행하다 아무도 보지 못할 때 난간에서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져 죽거나, 신호등에서 기다리는 데 갑자기 다른 차가 내 차 옆구리를 세게 받는 바람에 머리가 핸들에 부딪쳐 죽거나, 이스트헤이스팅스에서 홈리스와 시비가 붙어 그자가 휘두르는 과일 깎는 칼에 급소를 맞아 죽거나— 결국은 죽고 나면 남겨진 배우자와 자녀들이 심각한 재정난에 당면할 수 있으니 생명보험을 들어두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가질 것 아닙니까? 이런 자극적인 말로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무슨 금융업무? 캐나다는 선진국이라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객들이 저절로 찾아와 필요한 보험을 가입한다는 말에 속아 수업료 내어가면서 보험공부 열심히 했다. 보험중개인 자격증까지 가졌지만 한국의 보험아줌마와 다를 바 없다고 깨달은 것은 체 여섯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친하게 지내던 교회 사람들이나 이런 저런 인연으로 사귄 이웃들도, 보험중개인 명함만 주면 다음부터는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교육받고, 중개인 자격시험 보고, 보험협회 회비 내고 한 돈이 한 4,5백 여불 되니 그게 아까워서라도 한 번 해 보려고 했지만 내 언변과 재주로는 불감당이라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네트워크가 중요해. 보험 하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네트워크야. 강형. 가망고객에 대한 접근이 잘못되었어. 언젠가 죽을지 모르니 생명보험 들어두라고 하잖아. 자네는. 그거는 먹히지 않아. 사람은 말이야. 언젠가는 죽을 줄 알면서도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해. 기브앤드테이크 해야 돼. 내가 먼저 줘야 상대방도 내게 무언가 주려고 한다고. 잘 생각해 봐.

선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교민회 일 좀 해 달라고 하시는데. 그, 좀 시끄러운 동네 아닙니까?

아냐. 교민회 건물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시끄러우니 어쩌지 하는 거지. 우리 교민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를 거야. 강형은.

선배 말이 아니더라도 내심 구미 당기는 제안이었다. 인맥이 없어서 보험을 잘 팔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해서 못이기는 척 선배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이곳이 밤에 우범지역으로 변하기 때문만이 아녜요. 밤에 교민들이 회관에 오나요? 회관 건물이 너무 낡았어요. 강 선생님도 보시다시피요.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요. 부엌에는 어느 구멍에서 들어오는지 쥐들과 바퀴벌레들이 기어 다녀요. 한 70여 년 전에 지은 건물이래요. 그래도 몇몇 다른 민족 사람들이 부러워해요. 자기들은 그나마 없다구요.

내가 선배의 소개로 정은숙 회장을 만나보고 교민회의 재무이사로 봉사하기로 결심한 것은, 300여명 된다는 교민회 회원들에게 보험 상품을 팔아 보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없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지난 해 가을, 교민회 주최로 열린 추석잔치에서 정 회장이 출연하여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본 후였다. 또래 중년 한국여자 치고는 제법 커 보이는, 한 163cm 정도, 훤칠한 키에 태극문양에 들어가는 청색과 홍색이 조화된 저고리, 매화 두어 송이가 그려진 연분홍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꽤 매혹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연주할 때는 오래 전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타국에 와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민들레 홀씨처럼 터전을 잡은 노인네들의 흐느낌도 가끔 들렸다. 캐논 변주곡을 가야금으로 연주할 때는 초청된 외국인들이 박수를 보냈다. 예술을 통해 한민족은 물로, 타 민족과 교감을 이루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50대 후반의 중후한 매력도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그녀를 거부하랴. 2년 임기의 교민회장직을 마치고 연임의 의사를 밝힌 그녀는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녀가 언제 밴쿠버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같이 밴쿠버 교민 사회에 나타난 그녀는 3년 전 일반회원 자격으로 추석맞이 교민 예술제를 기획하면서 행사비용으로 만 불을 교민회에 기부했다. 재정이 어렵던 당시 회장단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여성부회장으로 영입했고, 1년 후 회원 다수결로 회장이 되었다. 임기 반이 지나 회계를 맡아보던 재무이사가 풀타임 직장에 취직되었다고 사임한 후 몇 개월 간 공백 기간이 있었고, 정 회장은 같은 교회 다니던 내 대학선배에게 새로운 재무이사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이었다.

정 회장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교민사회라는 것이 과거의 삶을 증빙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민 5년차가 되니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남자는 서울대, 여자는 이화여대 출신이라고 하는 데 그들에게 졸업증명서를 보여 달라고 억지 부릴 수 없는 일이니 더러 그런 학교를 중퇴하거나, 입학시험에 떨어지거나, 학교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학교 출신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학력을 과대포장하고 싶은 사람들만 내가 만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그 학교 출신이 아닌 것이 탄로 나더라도 그들은 태연히, 내가 언제 서울대 나왔다고 했나? 서울에서 대학 나왔다고 했지, 또는 아.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다녔어요, 하면 그뿐이었다.
그녀는 학교도 어디 다녔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냥 팔공(80)학번이라고만 했다. 내가 74학번이니 그녀는 한 6년 후배 정도 되겠구나! 추측만 할 뿐이었다.

2015년도 교민회장 선거는 추석 이후 한 달 만인 10월 27일 예정이었다. 선거관리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후보자 모집이 교민신문에 공고되었다. 비단 낡은 회관을 팔고 교민들이 왕래하기 좋은 장소에 새 건물을 짓자는 공약뿐 아니라, 해마다 만 불을 교민회에 기증해 온 정 회장이 아니면 교민회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단독후보만으로 찬반선거가 열릴 것으로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부회장을 하던 부동산 중개인인 이주일이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월급 주는 것도 아니고, 제 시간 쪼개서 봉사하는 일인데, 더구나 회장이 되면 운영비도 적지 않게 기부해야 하는데 이 부회장은 무엇 때문에 회장을 하려는 건지—

정 회장과 사무실에 둘이 있을 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저는 후보가 많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교민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분이 많다는 것 아니겠어요? 더 좋은 교민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경쟁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라고 괘념치 않았다. 그녀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듯해서 나도 한 2년은 그녀를 위해 교민회에서 봉사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