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긴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캐나다한국문인협회 제6회 한카문학상 공모를 통해 밴쿠버에서 문단 등단의 기회를 갖게 된 데 대해 우선 깊은 감사를 느낀다. 1980년, 스무 살 대학생 시절, ‘문인의 길’을 걷고자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38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다시, 그것도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뜻’을 이루게 되니 감회가 깊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 길고 험한 세월을 나름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며 쌓은 그간의 인생공부를 앞으로 시간을 아껴가며 충실히 작품에 담아보고자 한다. 모국에 ‘혼의 뿌리’를 두고 새로이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이민생활의 특수한 환경을 잘 살려서 보다 깊고 넓은 통찰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여는 데 힘쓰고자 한다.
한 발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심지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한다. 좋게 보면 깨우침이요 성장을 알리는 ‘한 소식(消息)’이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인생, 밀려드는 후회와 헛헛함은 또 어찌하랴. 젊어서 그리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 때 그 때 세상사에 밝아 온전한 지혜를 보지(保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또한 인간사이다 보니 뒤늦은 깨우침과 당혹스러움에 그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할 뿐이다. 인생살이 반 백 년, 지천명(知天命)의 고개를 넘어가는 이 마당에 생뚱맞게 『인생성적표』를 떠올리게 된 것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한 발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심지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한다. 좋게 보면 깨우침이요 성장을 알리는 ‘한 소식(消息)’이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인생, 밀려드는 후회와 헛헛함은 또 어찌하랴. 젊어서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때 그 때 세상사에 밝아 온전한 지혜를 보지(保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또한 인간사이다 보니 뒤늦은 깨우침과 당혹스러움에 그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할 뿐이다. 인생살이 반 백 년, 지천명(知天命)의 고개를 넘어가는 이 마당에 생뚱맞게 『인생성적표』를 떠올리게 된 것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내 인생에 첫 성적표는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수와 우가 한 두 개 있고 나머지는 미와 양으로 깔린 성적표를 보고 부모님은 그저 웃으셨다. 수 우 미 양 가가 뭘 의미하는지 조금은 궁금했던 내게 부모님은 다 괜찮고 좋다는 뜻이라고 했다. 별 차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부모님도 즐거워하시는 걸로 봐서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 보다 했다. 단지 조금 찝찝한 건, 두 살 위 형의 성적표는 거의 전부 ‘수’였고 ‘우’가 한 두 개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걸 몹시 아쉬워했다는 점이다. 두 성적표를 나란히 놓고 보니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개의친 않았다. 워낙 똑똑하고 잘난 형이라 좋은 성적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나는 그저 신나게 놀면 되니까…..
육군 장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원주와 영화(노량진)국민학교를 거쳐 세 번 째 들어간 은천국민학교(서울봉천동)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학생수가 많은 국민학교로 손꼽혔다. 전교생이 무려 12,000명에 달해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2부제 수업을 했지만 그래도 한 반에 70명이 넘는 콩나물교실이었다. 다행히 1년 뒤 4학년에 올라갈 때 신림국민학교로 분교되면서 상황이 좀 나아졌지만 그 곳도 곧 7,000명으로 불어나면서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다. 어쨌든, 신림국민학교 최고참 학년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면서 나는 심리적으로 작은 변화를 겪게 됐다. 제1회 졸업생이 될 우리에게 선생님들은 선배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했고 반에서 제일 키 큰 나는 선생님의 특별한 주목을 받은 데다 예쁜 여자아이도 서 너 명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성적표’에 관심을 갖게 된 사건이었다.
1학년때부터 줄곧 10등권 밖에 맴돌던 내 성적은 그 후 일취월장 5등권 안에 들어왔고 내친 김에 1등에 도전도 해보았지만 탁월한 머리는 아니어서 3~4등 싸움에 만족해야 했다. 어쨌든, 수, 우보다 미, 양이 더 많았던 그저 그런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형처럼 수, 우를 받는 우등생이 되었고, 신용산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전교 1,200명 중 50등 안에 들 만큼 제법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을 얼마 앞두고 아버지는 인문고 대신 공고(工高)에 가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스무 살에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자수성가하기까지 평생 고생하신 아버지의 삶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내 인생이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큰 슬픔이 밀려왔다. 며칠 고민 끝에 형처럼 장학금을 받는 학교로 가면 안 되겠냐고 다시 말씀 드리자 아버지는 잠시 곤혹스러워 하시더니 조건부로 허락하셨다. 대학까지 보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네 뜻이 그렇다면 어쨌든 애비로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마…. 기쁨과 동시에 죄스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나는 신생 특수지학교인 남강고에 지원해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할 때까지 3년간 장학금을 받고 다녔고, 대학도 절반은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그 덕에 어렵지 않게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부모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음은 물론이다.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성적표’가 어느 날 문득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면서 내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나아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아랫길’ 대신 ‘윗길’을 선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성적 덕(德)’을 크게 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반면,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는 매우 컸다. 성적은 곧 시험의 결과이기 때문에 늘 시험 압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옥 같은 시험에서 벗어나고 싶어 빨리 어른이 되길 갈망했지만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야말로 구속에서 해방되어 신세계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물론 회사에도 근무평가나 승진시험제도 같은 것이 있긴 하지만 학교처럼 분기별, 반기별로 심한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큰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평탄하게 살 수도 있으니 크게 개의할 일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시간이 생기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성적표 없는 인생’은 한결 살 만 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갈구했던 ‘대자유의 시대’는 기쁨 그 자체였다. 비로소 나는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유로운’ 새 삶을 시작했고, 결혼해 자식을 낳아 기르고 열심히 일해 승진도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인생공부도 나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사는 가운데 어느덧 30여년 세월이 흘러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건너 이순(耳順)을 향해 가는 나이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초로신사(初老紳士)’ 소리 듣고도 남을 나이지만 평균수명이 80대에 이르는 세월이다 보니 사뭇 사정이 달라졌다. 노인으로의 은퇴가 아닌, 『인생 2부』라는 또 한 번의 기회를 맞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게다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살아내기 바빴던 『인생1부』와 달리 『인생2부』는 어느 정도 세상이 보이니 좀더 알차고 지혜롭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지난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다 보니, 모두(冒頭)에서 말했듯, 뒤늦은 깨우침과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공부는 잘 했지만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 열등생이 된다는 말처럼 나도 그런 경우였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공부만 한 나는 세상 돌아가는 데 별 관심도 경험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현실’은 그야말로 깜깜이였다. 일찍이 이런 한계를 인식한 나는 철학 공부를 원했지만 부모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경영 쪽을 선택해야 했다. 몹시 아쉬운 선택이었다. 상극(相剋)의 엇갈린 선택은 결국 나를 혼돈으로 밀어 넣었고, 현실은 늘 힘들기만 했다. 세속적 삶의 의미와 가치는 도무지 와 닿질 않았고, 한 번뿐인 삶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깊어만 가는 갈증은 이내 출가(出家)할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갖게 되다 보니 그만 ‘빼박이(?)’가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정신적 방황으로 몹시 힘들어 하던 나를 잡아준 것은 바로 성철스님의 한 마디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일찍이 실존철학에 깊이 빠진 나는 자연히 종교를 멀리해 왔는데 우연히 듣게 된 성철스님의 말씀은 종교를 넘어 뭔가 아주 크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탁한 물에 맑은 연꽃이 피듯, 세속(世俗)에서도 ‘구도(求道)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한 생각’을 갖게 된 나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인생철학 공부에 정진(精進)하며, 나아가 나름의 ‘뜻’을 세우게 되었다. 나의 삶을 크게 달라지게 만든 ‘큰 변화’였다. 그러고 보면, 내 삶의 첫 번 째 기로는 ‘성적 덕(德)’이었던 데 반해 두 번 째 기로는 ‘삶의 큰 스승을 만난 덕(德)’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