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배(캐나다 한인 늘푸른 장년회 회장)

 

“UBC 수학과 이임학 교수님은 장범식 박사님의 서울대 물리대 수학과 스승이셨지요. 그것도 수제자였어요.  그 분이 장박사님을 눈 여겨 보셨는 모양이예요. 6.25전쟁으로 모든 것이 어려진 상황에서 학문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장박사님은 스승님의 뒤를 따라 여기 캐나다 밴쿠버, 신세계로 건너오신 거죠.”

장동순 여사. 이임학 교수에 이은 밴쿠버 두번째 유학생 장동식박사의 부인은 사랑했던 남편과의 사별 후에도 단정하고 고아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9순을 넘긴 정도로 알고 있을 뿐 나이를 묻는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UBC 부근 노인전용 고층아파트에 혼자 사는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장박사가 밴쿠버에 오게 된 동기를 필자에게 차근히 이야기해 주었다.

평소 존경하던 이임학 교수가 돌연 잘 알지 못하는 나라로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난 것이 1953년. 가끔 수제자였던 장박사와 안부를 주고받던 이임학 교수는 전후의 암담한 현실에서 학문에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제자에게 밴쿠버로 올 것을 권유한다. UBC라는 좋은 대학이 있고, 그 대학은 오로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 있으니, 폐허가 된 조국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젊은 인재가 선진국의 새 학문을 받아들여야 후에 조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스승의 제안을 선뜻 수락한다.

해외유학이 지금도 쉽지 않은 것은 언어와 풍습이 다른 곳에의 적용에 대한 어려움 때문이다. 하물며 70여년 전이랴. 그러나 스승님이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었기에 한결 안심이 되었으리라. 장범식 박사는 1955년 스승의 초청으로 밴쿠버에 첫 발을 디딘다. 밴쿠버 최초 한인 거주자로서 두 번째이자 남한 출신(이임학 교수는 북한 출신)으로는 첫번째 라는 역사의 기록을 수립하면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임학 박사의 지도와 보살핌 속에서 학업에 정진하여 1959년 UBC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자신과의 약속대로 그는 모국으로 돌아가 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수학과 교수로 재직한다. 그는 조국땅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당시 육군소장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혁명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것은 오늘에 와서는 한국인을 ‘보수’와 ‘진보’로 갈라놓는 불씨가 되었다. 모든 혁명에 대한 잘잘못의 판단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혹자는 군사독재로 인해 전후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고 하고, 혹자는 의견이 난분분하여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하는 민주주의 보다 독재적인 관리경제가 오늘날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시켰다고 한다. 정치체제는 그로 인해 덕을 보았느냐, 손해를 보았느냐에 따라 호 불호가 엇갈린다.

짐작컨데 20대 중반의 최고 지성인, 그것도 민주주의 나라인 캐나다에서 4년간 수학한 장박사에게는 군사정권의 등장이 달가웠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정권의 편에 서지 않고, 정권에 의해 탄압받는 자들 편에 섰다. 당연히 군사정권의 눈에 그의 행보가 밉게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 교수직을 잃게 되었다.

경제개발이라는 명목아래 철천지 원수였던 일본에게도 손 벌리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대국에 의존하던 정권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한 번쯤 회의에 빠졌을 조국의 상황은 그 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숨막히는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다.

“UBC 쪽에서 장박사님의 해고소식을 전해 듣고 막 화를 냈다고 들었어요. 세계의 명문이라고 자부하는 UBC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해고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차라리 한국을 떠나 UBC에 와서 교수를 하라. 는 이야기가 나왔 데요. 그러나 두번씩이나 한국을 떠나기가 쉽지는 않았겠지요.”

1962년. 장박사는 조국에 남아서 투사로서의 삶보다 조국을 떠나 세계 최고의 학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여, UBC 수학과 교수가 된다. 2001년 모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서 밴쿠버로 직접 이민 온 사람은 없었고, 미국을 경유하여 캐나다에 정착한 심선식 씨, 김풍환 씨, 장근영 씨, 김양규 씨, 유명중 씨, 이현주 씨, 김광덕 씨, 오장옥 씨 등 유학파들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교수 부인이니 편안하게 살았지 않았겠느냐고요? 천만에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수 월급이 어디 넉넉하던 가요? 한국에서는 가장이 돈 벌고 부인은 자녀 양육하는 것이 법도였지만 캐나다는 달랐어요. 가정경제를 원활히 지탱하려면 둘이 벌어야 했지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은 생선공장에 다니면서 내조를 했어요. 힘든 일이었지요. 다행히 저는 UBC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했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보람도 있었어요”

탁자 위에 놓인 결혼사진을 본다. 청춘의 곱던 자태는 어느새 시들어 가고, 유한한 삶의 끝자락이 저 만치서 기다리지만 장범식 박사의 부인 장동순여사는 낯선 곳에서의 여정을 지금도 두려움 없이 즐기고 산다.

장박사는 비록 스승인 이임학교수처럼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후학을 양성하고, 가정의 화목과 자녀교육에 힘쓴 평범한 학자이자 가장의 책무를 다한 분이라고 홀로 남은 아내는 그를 회상한다. 뿐이랴. 밴쿠버 한인 이민사에 자랑스러운 선구자로 남아, 이제 유학을 오건 이민을 오건 후세대의 귀감이 되어 빛나고 있다. 사진속 온화하고 따뜻한 표정의 장박사는 ‘당신도 후대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요’하고 부드러운 스승의 음성으로 내게 속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