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회 회장 선거결과는 내 예상과는 빗나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40여년 가까이 쌓인 이주일의 인맥이 결국 밴쿠버에 온 지 채 5년이 안 되는 정은숙의 교민사회 기부선심을 꺾은 것이다. 떡도 생기지 않고 밥도 생기지 않는 자리였지만 막상 선거에서 패배하고 정은숙을 돕던 내가 물러나야 하니 섭섭했다. 교민회에서 재무이사로 봉사하는 일은 다시 직장에서 일을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금전적 대가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인수인계를 하겠다고 한인회 사무실에 나타난 신임 재무이사가 나의 은행 입사 동기라는 것이다. 이회장과 함께 와서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는 모습이 마치 무슨 점령군 같은 태도였다. 나는 그가 언제 밴쿠버에 왔는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지금은 무얼 하고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퇴계로 지점에 근무한 지 1년 후 그는 종로지점으로 발령이 났고, 나는 본점 국제영업부로 발령이 났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함께 근무할 기회가 없었다. 가끔 입사동기 회에서 만나기는 했지만 1997년 IMF경제위기가 한국에 닥쳤을 때 그가 정리해고 당한 뒤에는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사실 그리 친한 관계도 아니었다. 나는 그나마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그는 지방대학 출신이어서 퇴계로 지점에 근무할 때도 애써 내게 거리감을 두는 눈치가 보였었다.

자네는 그 난리 통에도 잘리지 않고 정년퇴직 했다지? 정리해고 당한 동기들 사이에서 은행장이 자네 선배라서 살생 부에 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돌았어. 난 말이야. 목돈으로 받은 퇴직금, 서투른 통닭집 한다고 다 날리고 7년 전에 밴쿠버로 왔지. 자네는 왜 왔어? 답답할 것도 별로 없었을 턴데.

기준범이 내게 던진 질문은 정말 몰라서라기보다는 자기가 아는 것을 확인해 보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이주일이 어렴풋이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 집사 중에 한성은행 출신이 있다고. IMF전후하여 은행원들이 많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이민을 갔고, 구태여 타국에서 옛 직장동료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어, 그래요? 하고 지나친 적이 있었다.

나도 이주일이 다니는 부동산회사에 소속되어 있어. 처음 이민 왔을 때 이것저것 장사 좀 해 보가가 시원찮아 다 때려치우고 지금은 부동산 중개업무 하고 있어. 시작한 지 6개월 체 되지 않았지. 그 동안 이 회장에게서 이것저것 많은 도움을 받았지.

그런 연유로 그는 이주일을 도왔는데 내가 정회장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일부러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사람아. 한인회장 선거가 뭐 대단하다고. 이 회장으로부터 내 이야기 들었으면 바로 연락 주지. 같은 밴쿠버 하늘아래 있으면서 좀 섭섭하네. 사실 섭섭한지 의례적인 인사말인지 나 자신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승리자와 패배자의 자격으로 만나기보다는 같은 곳으로 이민 온 전직 입사동기로 만났더라면 더 반가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영옥이 하고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옛날 일은 이제 다 화해하기로 한 건가?

기준범이 갑자기 뚱딴지 같은 질문을 했다. 뭐? 누구? 문영옥이? 그게 누군데? 기준범은 멀뚱멀뚱해 하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정말 몰라? 문영옥이를? 퇴계로 지점 예금계. 같은 계원이었잖아. 자네는 대학졸업하고 바로 들어와서 주임이었고, 문영옥이는 그때 여상 나와서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지. 왜, 가끔 은행 홍보과에 불려가서 한성은행 포스타나 팸플릿에 들어가는 사진 모델 노릇 좀 했잖아.

아. 문영옥이. 30년 전 옛날로 돌아가 지금은 얼굴도 자세히 기억나지 않고 그저 날씬하고 조신하고 수줍음 많은 신입사원이라는 기억만 어슴푸레 떠올랐다. 생각이 날 것도 같아. 그때 내 담당대리가 오대리였지? 오연숙. 신입사원 때 내게 극성스럽게 친절해서 아직도 이름이 생각나네. 내 말에 기준범은 생경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 어떻게 그 사건을 잊을 수 있어? 우리 첫 직장에서 벌어진 일이라 나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무슨 사건? 무슨 일 있었던가, 그때? 아, 이사람 참 정말 잊어버린 모양이네. 백만 원 현금다발 도난사건.

순간,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며 그런 표정을 기준범에게 애써 숨기려 했다. 기준범은 범죄자의 자백을 유도한 형사처럼 의기양양했다. 문영옥의 책상 서랍에서 백만 원 현금다발이 없어져서 난리 났었잖아. 문영옥이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고. 그때 오대리가 문영옥을 제외하고 다른 예금계 계원들하고 밀담을 했지. 이 사실을 검사부에 보고하면 문영옥이 뿐 아니라 오대리까지 연대책임을 지니까, 돈만 채워 놓으면 없던 일로 하자고 문영옥이에게 통보했잖아. 나중에 결국 검사부에 보고했지. 문영옥이 수중에 그만한 돈 없다고, 없어진 돈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문영옥은 사표를 제출했다. 1980년대 초, 당시 백만 원은 매우 큰돈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문영옥이 어린 나이에 얼굴 반반하다고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비싼 옷 사고, 장신구사고, 명품가방에 구두까지 사느라 월급으로는 모자라니 그런 짓을 벌였다고 지점 내에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문영옥이 떠난 자리에 내가 앉게 되었다. 그녀의 책상 서랍을 여는데 잘 열리지 않아서 혹 무언가 책상 서랍 뒤로 끼여 있는가? 살폈더니 거기 백만 원 현금다발이 꽉 끼어있지 않는가. 사라져버렸다던 그 돈이었다. 오대리에게 이야기하고 문영옥이를 복직시키자고 했더니, 그녀는, 기왕 나갔는데 그만 두세요. 남이 알면 우리 잘못으로 엉뚱한 사람 내 보낸 것으로 생각할 턴데. 그냥 넘어 가시자고요. 예금계만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면 되잖아요. 하면서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나는 당시 신입사원이라서 담당 대리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비겁했다. 이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고 바로잡아야 했다. 문영옥의 결백이 밝혀졌으면 그녀를 다시 복직하게 했어야 했다. 나는 오대리의 차가운 표정에 움찔해서, 뭐, 내 일도 아닌데,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때 정현수가 막 자동차 부품 몇 가지를 만들러 현대에 납품할 때였어. 한성은행 퇴계로지점과 거래했잖아. 그때만 해도 공장규모가 작았지. 그런데 사람이 정이 많았어. 문영옥이를 잘 본 거지. 아름 아름으로 삼청각 요정 경리사원으로 취직시켰지. 문영옥이는 거기서 돈 관리만 했지 기생을 한 적이 없어. 가야금은 눈대중으로 기생들에게서 배운 거지. 악기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었지.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기준범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기 시작했다.

정현수가 가끔 자동차업체 구매담당자들을 대접하느라 삼청각에 들렀어. 처음에는 문영옥에게 안부나 전하고 그러더니 어느 날 술 한 잔 걸친 그 놈이 문영옥이를 어떻게 한 모양이야. 엄연히 지 마누라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마누라와 사이에 아들 둘, 딸 하나 두었다 하더라고. 회사 규모가 커지고 재산도 많아지니 문영옥의 존재를 알고도 가만히 두고 보던 정현수 마누라가 문영옥이 사는 집, 그것도 정현수가 다 마련해 준 것이지만, 찾아가서 문영옥이 머리끄덩이 잡아채고 이년 저년 하면서 한바탕 난리를 치른 모양이야.
더구나 그때 문영옥이도 어린 아들, 딸이 하나씩 있었지. 정현수와 사이에. 일방적으로 가만히 당하기만 하던 문영옥이 그랬대. 눈앞에서 사라져 줄 테니까, 대신 먹고 살 돈을 마련해 달라고. 그랬더니 본처가 나중에 유산상속 문제가 불거지면 권리주장 않겠다는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 상당한 돈을 지불해고, 그 돈으로 문영옥은 밴쿠버에 온 거래. 투자이민으로.

아 그랬군. 그런데 문영옥이 왜 정은숙으로 둔갑했어? 교민사회에서 모두 그녀를 정은숙으로 알고 있지 문영옥이라고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아이아버지가 정씨니까 서양식으로 라스트네임을 정으로 하고, 은숙이는 그냥 자기가 좋아하던 이름 하나 갖다 부쳤겠지. 여권에는 그대로 문영옥으로 되어 있을 꺼야.
자네는 어떻게 그리 문영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삼청각 경리 담당할 때 내가 있는 종로지점에다 영옥이가 은행구좌를 개설했어. 내가 퇴계로 지점 한 1년 근무하다가 종로지점으로 발령 났잖아. 거기서 다시 만난 거야. 그래도 예전 직장동료라고 가끔 차도 한잔 하고, 기분이 꿀꿀하면 맥주도 한잔 했지. 그때는 이미 정현수의 여자였어. 신세한탄도 하고 그러더라고. 퇴계로 지점에서 홧김에 사표를 내지 않았더라면 얌전하게 은행근무 하다가 착실한 사람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을 터인데. 퇴계로 사건 이후로 좀 엇나가기 시작했던 모양이야. 유부남인줄 알면서 자기를 챙겨주는 정사장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다음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