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 생활은 안녕하고 있다 . 어떻게?
아주 평범한 일로만 여겨졌던 일이 새로운 일에 부대끼며 생활하게 되어 기쁨과 감사도 간간히 마음을 적셔 줄때가 있다. 거의 매일 남편과 한 공간에 있는 시간이 결혼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 때로는 불협화음이 일어 날 때도 있지만 자신들을 알아보는 시간이라 서로 끝까지 투쟁으로는 가지 않고 각자의 마음 밭으로 기수를 돌려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굳이 알려고 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알아지고 눈에 들어오는 일이 있다. 서로에게 거리두기가 필요 했구나 싶고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상대에 대한 대접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의 평범하게 주어진 일들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아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 일터를 찾아서 타지에 나가 경제적인 독립까지도 하겠다고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층에 렌트를 살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낮에 일 나가고 밤에 돌아오니 지하실이 그리 불편한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택근무를 하고보니 하루 종일 햇빛을 볼 수 없이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들이 말했다. 그냥 구름 끼고 비 오지 않는 다음에야 햇빛은 당연히 보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 고마움을 몰랐다는 말을 했다. 누나들과 가족 모두가 모금을 하여 불우이웃돕기를 하여 5월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사를 한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밤 잘 자고 일어난 일이 고마운 일이고 손 씻기 자주하는데 있어서 깨끗한 수돗물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고 더 깨끗이 하려고 세제 또한 일조를 해주어 개운함을 더하여 안심할 수 있게 해준다. 하물며 목마르고 갈증 날 새도 없이 항상 마실 물을 어려움 없이 마실 수 있는 여건에 새삼스레 고마움이 깃든다. 생필품과 그로서리 쇼핑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들의 사용이 아무의미도 없이 그냥 마냥 주어질 줄로만 알고 살았던 시간들이 있었음에 지금은 휴지 한 조각 , 야채 이파리 한 잎, 쌀 한 톨이 이토록 소중할 수가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여기에 오기까지의 누군가의 수고가 소중함과 절약함으로 다가오고 남편의  51년 동안 한 가지 일에 종사하면서 밥 벌어 먹인  손 기술이 따뜻한 온기로 느껴진다.

지구촌 어디에도 지금 같은 사태에 정해놓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겠지만 이런 형평성에 어려움을 겪고는 있을지라도 고통으로만 생각하고 간과할 일은 아닐듯하다. 일찍이, 한 가족이라고 말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도 서로가 마음이 같고 일치되기란 어려웠을 때가 있었다. 가족들이 서로를 걱정하고 도와주고 적어도 1 인분의 책임은 본인 스스로 져야 한다는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짓게 되고 고마웠다. 이로 인하여 서로 신뢰가 생기고 가족에게서부터 함께 잘 살자는 마인드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골프를 가지 못해 무료한 시간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남편과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곧 지나가는 나의 말이 옳다는 주장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 내 모습을 본다.
뭐가 그리도 나만 옳은 일이 많았는지

하루세끼 밥 차리는 나 자신에게 고마운 손길을 펴 보이면서 남편에게 묻는다. “여보 , 뭐 해 줄까요?”하고. 밥을 먹다 얘기 한다. ” 난 당신이 골프장 가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는 게 무서워요 , 이 시기만 잘 넘기고 나면 서로 건강 잘 유지하여서 당신과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싸움이라도 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음에 그 또한 고마운 일이다. 불만스럽고 괴롭고 불안해서 힘들어 하는 그 모두는 거기에서 벗어나기만 해야겠다는 분별이 있을 때 양극이 대립하게 되고 옳고 그름의 선택 앞에 명쾌한 해답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에게 주어진 해답은 괴로움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없애야 한다느니 노력을 해서 바꾸어야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 본성 ((本性) 즉 이 법(法)을 체험하여 그 분별의 좋고 나쁨, 나의 의지로 분별해서 뭘 할 수 있다는 것이 부서져 버리는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고도 표현하며 지혜라고도 말하고 불교에서는 “한 소식”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번뇌의 습관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아님을 알고 있는 터이고 질기고도 질긴 인연이지만 이 법의 체험으로 일일이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지 않아도 되는 한 방에 가위로 싹둑 잘라져 나가는 속 시원한 체험을 했다. 숨을 쉴 수 있었고 어떤 이론도 아니었고 단계를 밟아 하나씩 해결되는 것도 아니며 바로 마음에 적용되는 실용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내 생각이란 것이 한낱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잠잘 때 꿈을 꾸는 일과 똑같은 일이란 것을 알게 되고 꿈은 깨고 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 꿈 이라는 생각을 붙들고 좋은 꿈 나쁜 꿈 분별해야 한다고 하면서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아 헤매는 일과 뭐가 다르다는 건지 그렇게 헤매면서 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생각이란 꿈에서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는 그 허상을 쫒아 질주하고 있는 모습이란 것이….

그러기에 이 본성은 내가 찾아야겠다는 이 마음만 가지지 않아도 또는 좋고 나쁨의 분별만 하지 않아도 체험은 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허나 그 분별 역시도 체험을 하지 않고는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다. 따라서 내가 뭘 해서 되는 일은 아님을 인정해야한다. 이러한 본성은 고기가 물속에 항시 있으니 물을 의식하지 못하여 때로는 찾아 나서듯이 우리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었던 것을 찾아야한다고… 그렇게 돼야 행복할 거라고 망상과 착각의 시간을 보내 왔던 것이다.

한 번의 체험! 세상만사가 “이것”뿐임을 알아차린다. 분별하고 분리해야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망상에 가려져서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격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딸이 말했다.”엄마, 나 요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할일도 없고 해서 술을 많이 마시네, 이러다가 알코올중독자  되는 것 아닐까?” 나의 말이다  “그래 더 많이 마셔라, 이 기회에 양이 찰 때 까지 마셔버려라. “딸이 다시 말했다.”이제 그만 마셔도 될 것 같애 엄마.” 엄마에게 그런 말 할 수 있는 딸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그런 딸과의 대화에서는 이미 좋고 나쁨의 편견과 분별이 무장해제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평범한 오늘을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