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60분에 현대차 하청업체 중에 한곳에서 사장이 자살한 이야기를 통해 하청과 재하청을 하면서  2차 하청업체에 대한  1차 하청업체의 갑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재벌회사로 재취업한 공무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현대차에서 사내에서도 하청을 주어서 생산을 하고 외주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사내하청은 이미 거의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었다고 대법에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현대차는 다른 외국기업에 비해 영업이익이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이러한 현대차의 수익증가엔 모든 것을 재하청회사에 떠 넘기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원청과 하청업체가 가격을 흥정을 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원청에서 정한 가격에 매년 2~3%의 원가절감을 요구하니 재하청업체는 도산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납품 단가 후려치기를 하고도 상생을 말하고 있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이상한 원가 계산 방식이 결국엔 대부분의 2차 하청업체를 도산시키고 대한민국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고 있는 것이다.
경주의 최부자 집이 비교된다.
경주와 현대의 근거지는 울산. 지역은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이 교차된다. 일제시대 외국인의 눈에 비친 경주 최부잣집의 모습에서 당시 그 집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1926년 10월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고분 하나가 발굴되고 있었다.
발굴 단원 중에 파란 눈의 신혼부부가 끼어 있었다.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 부처였다.
고고학에 관심 많은 황태자가 동양에 신혼 여행 왔다가  경주에서 발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서 배를 타고 온 길이었다.
훗날 스웨덴 국왕이 된 황태자는 그때 머물렀던 고분 근처 한 양반집안의 사랑채를 잊을 수 없었다.
아담하고 운치 있는 건물,  향긋한 내음의 법주(法酒),  금빛 나는 놋 그릇에 담겨 나온 정갈한 음식….
누군가 스웨덴을 방문했을때 그는 물었다.
“ 경주  최씨네 사랑채에는 지금도 사람이 많은가요?”
경주 최씨네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꾼으로 내려 온 집안이었다. 단지 부자였을 뿐 아니라 ‘사방백리(약 40키로미터)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가훈을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실천에 옮겨 존경 받았다.  찾아오는 과객(손님)은 귀천(신분의귀하고천함)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가  이 집의 가훈이었다.손님이 많을때는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해서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최 부잣집의  1년 소작수입은 쌀  3000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000석을 손님접대에 썼다. 손님이 떠날때면 과메기 한 손(두마리)과 하루 분의 양식을 쥐어 보냈다. 최 부잣집은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는 철칙도 갖고 있었다. 혹시 논을 더샀더라도재산이 1만석을 넘지않으려면 소작료를 낮춰적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소작인들은 최 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그만큼 소작료가 떨어지기 때문에 최부자네가 땅 사는 걸 배 아파하기는 커녕 자기일처럼 기뻐했다. 욕심을 버리고 나니 기쁨이 찾아 온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말로만 되지 않는다.  진정한 나눔이 있어야 가능하다.
원효대사와 사랑을 나눈 신라 요석공주의 궁터에 있던  최 부잣집 사랑채는 1970년 불에 타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상태다. 이걸  경주시가 복원해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책무)를 상징하는 관광명소로 꾸미겠다고 밝혔다.
최 부잣집의 재산은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으로 많이 쓰이고  나머지는 광복 후 교육사업에 들어가 지금은 집 조차 후손들 소유가 아니다.
만석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이 시대에 이어 갈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
‘부자 3대를 못간다.’ 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  부잣집의 만석꾼 전통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이어갔고  마지막에는  1950년,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스스로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진 줄로 알았다. 나설 때 나서지 못하고 물러 설 때 물러서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졸부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 부잣집  가훈은 오늘날 우리 모두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1. 진사(제일낮은벼슬.단순명예직.) 이상의 벼 슬을 하지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사던 시대에도 권력과 금력이신 분이라는 요즘에도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2.  재산은  1년에  1만석(약 5천가마니)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 재산 때문에 어머니를 칼로 찔렀다는 뉴스가 회자되는 요즘 다시 한번 생각케하는 대목이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했다. (도네이션 조차 세금을 덜 내고 이름을 내려고 하는 재벌들과 비교된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나그네는 고사하고 직원들과 늘 줄다리기해서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는 재벌가엔 노사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사지 말라.
흉년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해서는 안 된다. (남의 불행이 나의 기회이자 행복이라고 골목까지 치고 들어가 서민들의 밥그릇까지 빼았고 서민들을 그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재벌이 많다.)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 오면  3년동안 무명 옷을 입혀라. (3년동안 비단옷을 입히지 마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세계곳곳에서 명품은 다 사 들여서 내 것으로 하고 명품으로 휘감아야 사람 대접하는 사회도 문제라면 문제다.)

6. 사방 100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흉년일수록 물가가 뛰어서 농산물이 오르고 식당의 음식값이 오르고 모든게 따라 오르는 요즘 세태엔 함께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흉년엔 매점매석을 해서 돈 벌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 [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중에서-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못 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 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악취가 나는 것은 같지만 쓰임이 어떠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경주 최부잣집은 두가지 감동으로 우리들에게 감명깊게 남아 있다.
“서기 1671년 현 종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 부잣집을 찾아 몰려 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 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자를 먹여 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 길이 있었다. … 그해 이후 이집에는 가훈 한가지가 덧붙여진다. ‘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어찌 보면 바보 같은 길이다. “최국선은 아들에게서 궤서랍에 있는 담보 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때 다시 참전했다. 마량첨사, 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  통정대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의 셋째 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도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실현했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 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가 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 조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재상을 많이 배출해서 이름을 남긴 것이 아닌 진정한 선비정신을 구현한 최부잣집을 들여다보자

함께더불어살아가는부:
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책임)를 구현한 조선 명문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경제 외적 노하우:
모난돌이 정 맞는다고 높은 관직에 오르지 않고 진사까지만을 하도록 한 가문의 유훈은 그들이 오래도록 조용하게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문의장기생존과발전:
왕과 귀족이 전횡을 일삼던 시대에 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고 힘들다.
더구나 전쟁과 식민통치, 독재정치와 재벌의 전횡 등으로 점철 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미국엔 케네디가의 성공의 교훈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많이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만의 교육을 통해 나라없이 2000년을 떠돌면서도 민족의 뿌리를 잃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엔 최가가 앉은 자리풀도 안 난다는 속담이 무색한 경주 최씨  가문의 후손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된다. 조선에선 아주 드물게 가문의 도덕률,  처세술, 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전승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마지막승부:
일제와 해방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자금과 대학 설립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 문에서 내려 온 것이다.

전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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