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글 현순일 (91세, 6.25참전유공자회 회원) 요약 정리 송요상 사진 이지은 기자
 
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6년에 평안북도 박천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의 고향은 200가구가 모여 있는 전통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영변군이 있고 남쪽으로는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는 청천강이 흐르고 바로 안주군이 인접해있다.
나는 중학교 재학 중에 8.15 해방을 맞이했다. 5년제 학교 재학 중에 1948년 서울에 와서 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부친은 해방 후에 사업 때문에 서울에 먼저 오셨고 신당동에 집을 구하셨는데 그 부근에  친척이 운영하는 피혁상점에서 일을 하며 생활했다. 상점은 분주했다. 부친께서는 상점의 물품구입을 위해 전국을 오가면서 출장길에 바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1950년 6월 25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쳐들어왔다는  방송이 길가에 흘러나왔다. 26일까지 대포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방송에서는 움직이지 말라고 해서 집에 있었다.
6,25가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저녁때였다. 나는 불안해졌다. 내가 생활하는 서울 신당 동에서는 전쟁에 대한 뉴스들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 부친은 사업차 제주도로 출장을 가셨기 때문에 혼자서 불안해진 나는 한강 근처인 마포 염리동에 사시는 고모 댁으로 갔다, 물론 타고 갈 대중교통수단이 없어 세 시간 이상을 걸어 도착했다, 고모부가 철도경찰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전쟁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모부는 전쟁이 나자 비상근무 중이어서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고 고모는 어린 4남매를 돌보고 있었다. 고모는 나에게 장녀(10세)와 차녀(8세)를 데리고 고모부가 근무하는 한강너머로 먼저 가라고 했다.  그날  27일 새벽 3시에 한강 철교는 폭파되어 나루터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저 멀리 한강 건너편에도 나룻배를 타고 건너간 사람들이 건너오지 못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고 건너야 할 배는 몇 척되지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배만 강변에 도착하면 몰려가 올라탔다.
무질서 그 자체였다. 젊은 나는 둘을 안고 배가 강변에 도착하자 뛰어가 조카들을 실었지만 내가 탈 자리는 없었다. 곧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배는 뒤집어지고 가라앉았다. 2십여 명이 타는 배에 30여명이 넘게 탔으니 당연히 갈아 앉을 수밖에. 배는 두 번이나 갈아 앉았다. 어른들은 다음 배를 타기로 하고 노인과 어린이만 태웠다. 나는 어린 조카 둘을 보낼 수 없어 수영을 해서 배를 따라 가면서 힘이 들면 배의 뒷머리를 붙들고 수영을 했다. 중간쯤에 오니 너무 힘이 들었지만 어린 조카들을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에 사력을 다해 그 넓은 한강을 헤엄치며 건너갔다.  다행히 애들과 나는 무사했다.
고모부의 철도경찰 부대가 영등포 역에서 대기한다고 했지만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남으로 무작정 떠나고 있었다. 나도 경북 문경에 있는 조카들의 조부모님 댁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수원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는 군용차들이 바쁘게 질주하고 있었다. 길가에서 잠시 쉬면서 취사도구를 꺼내 밥을 해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도 허기가 졌다. 나도 준비해온 냄비에 소량의 쌀로 밥을 짓고 된장과 멸치로 끼니를 때웠다. 또 다시 남쪽을 향해 걸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수원 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는 화물차가 보였는데 화물차 안에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기차 지붕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조카 둘을 먼저 지붕위로 올리고 그 옆으로 올라갔다. 지붕도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했다. 모두 보따리들을 손에 들었고 또는 깔고 앉아 있었다. 위험한 피난길이었다. 한 밤중이 되자  기차는 출발했다. 차가 곡선을 돌며 심하게 움직일 때마다 기차 밖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찌 되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위험한 화물차 지붕위에서 살아난 것이 다행으로 생각하며 기적적으로 무사히 평택 역까지 왔다. 평택 역에서 북한군의 비행기가 공습하자 지하 건널목으로 피난했다. 모두가 무사했다.
평택 역에서 우연히 5촌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가족과 함께 경북 점촌에 있는 집으로 가기위해 기차에 타고 있었다. 다행히 기차를 함께 타고 갈 수 있었고 나와  두 조카는 문경으로 갔다. 문경에 도착해 한약방을 운영하시는 할아버지를 찾아 갔다. 할머니와 함께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7월이 되었다.
전쟁 중이라 장날이 되어도 상인들이 나오지 않아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웠다. 모내기철이므로 나는 이웃집 논에 나가 모를 심고 일 삵으로 겉보리 2말을 받았다. 7월 중순이 넘어가자 문경에도 북한군이 점령해 들어왔다. 남한은 거의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조카들을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문경에서 5일 만에 서울로 올라 갈 수 있었다. 가는 도중에 인민군 보안대에 심문을 받기도 했지만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 별다른 탈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마을로 들어가 구걸하며 끼니를 때웠다. 어린 조카들과 동행하는 나의 모습이 집을 잃은 난민같이 보였기 때문에 음식을 구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거리에는 온통 인민군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고모님 댁으로 무사히 조카들을 보내고 나는 그 부근의 적산가옥(일본사람들이 버리고 간 집)을 발견하고 숨어 지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에 인민군 3명이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와 옆집으로 피했다가 발각되어 붙잡혀 끌려갔다. 잡혀간 곳에는 나와 같은 청년들이 20여명이나 있었고 계속해서 인민군이 청년들을 데려 왔다.
인솔자로 보이는 인민군 장교 한명이 청년들을 모아 놓고 북한으로 데려가 대우를 잘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곧 출발한다고 했다. 나는 잠시 소란한 틈을 이용해 감시망을 피하고 옆집 화장실에 들어가 숨어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마 서너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어둠이 오고 조용해지자 그들은 모두 떠난 것 같았다.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가을이 오고 있었던  9월 중순 어느 날 서울 시내 곳곳에서 불이 났고 거리마다 물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서울과 인천 사이가 불바다라고 이웃들이 전한다.  9월 15일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서울을 28일 탈환했는데 북한군이 모든 물자들을 태우고 북으로 후퇴했다는 소식이다. 미 해병과 국군 해병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지만 그동안 먹지 못해 영양실조와 체력이 떨어져 서울 탈환의 기쁨을 맞이하기 어려웠다. 서울의 집을 찾아가니 부친이 먼저 오셨다. 
부친과 함께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미군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군속이 되어 고향을 찾아 북으로 가기로 원했지만 곧 꿈은 깨지고 말았다. 우리보다 먼저 고향으로 간 사람들이 다시 서울로 왔다. 물밀 듯이 중공군이 내려와 서울을 다시 내어줄 처지에 놓였다. 나는 부친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구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피난길에 나선 기차는 만원이었으나 무사히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의 시민들은 피난민들을 애정으로 대했다. 각 교회마다 식료품과 구호품을 나누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특히 대구 서문시장부근에 있는 제일 교회에서 환영식을 해준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대구에서의 피난 생활은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부친께서 수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피혁을 매매하기위하여 상인들과 교분이 있었고 또 부친의 인간관계가 원만한데다가 약간의 자금까지 소지하고 있어 생활하는데 걱정 이 없었다.
1951년 7월 나는 전투경찰에 지원했다. 대구의 여름은 무더웠다. 한 달 동안 군사교육을 받고 3일간 사격연습을 했다. 곧 태백산 전투경찰 사령부 207부대로 발령을 받았다. 지리산북부와 동쪽이 관할 구역이어서 전북 고창으로 갔다. 고창일대에 있는 공비토벌이 주요 임무였다, 잠시 동안이지만 중부전선의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남부전선은 맥아더원수의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중부전선을 방위하고 있어  미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수세에 몰린 북한군패잔병과 이들을 도와준 부역행위자가 집결해 그 수는 많았고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낮에는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수시로 마을로 내려와 지서들을 습격하고 교란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른바 공비들의 횡포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밤이면 민가에 잠입해 식량을 탈취하고 또 지서와 마을의 공공기관을 점거해 인민재판을 벌이며 많은 사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1951년 10월 1일 국군 6개 사단이 일시에 군장검사를 마치고 공비들을 토벌한다는 작전을 전개했다. 공비가 너무 많아 남쪽의 국민들은 두발 뻗고 편히 잠들 수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각 트럭이 길게 늘어서고 군장 검사를 하려고 군과 경찰은 모두 도열했다. 내가 속해있는 사단은 지리산 남부의 공비들을 토벌하는 임무였다. 군장 검사가 끝나고  전략적으로 헬리콥터가 산 정상에 올라 불을 내고 공비대장 총살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방이  소강 상태였기 때문에 백선엽 장군이 사단을 지휘했다. 작전은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공비들의 병력은 아군의 병력과 비슷해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게다가 공비들은 지형에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에 게릴라전에 강했고 아군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굴까지 비슷해 군복을 바꿔 입고 위장하면 구분이 어려웠다.
나의 중대가 트럭 4대로 산등선을 따라 전진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 중대는 그동안 유능한 부대장의 지휘 하에 전과가 많았다. 나는 2번째 트럭에 타고 있었다. 갑자기 산 위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나는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렸고 벼랑 끝으로 몸을 피했다. 총성이 멎어지고 도로로 올라오니 4대 차량 중 28명이 전사하는 사고가 생겼다.  나는 어렵게 뛰어내려 총격전을 벌였고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포탄과 총격으로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은 그 자리에서 화장할 수밖에 없었다. 냄새가 진동했고 3일이 걸렸다. 그 전투는 동안 평생 기억에 남아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공비토벌작전은 계속되었다. 깊은 산속 어둠속에서 추위를 맞이하면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치고 빠지는 공비와의 싸움은 순간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생존의 문제였지만 나의 존재를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무조건 공비가 나타나면 내가 적군의 총에 맞아 죽기 전에 먼저 화력으로 제압하고 이겨야만 한다는 일념만이 가슴 속에 들끓고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함께 생을 같이하며 동행하는 전우들 속에서 눈빛만 반짝이는 나의 모습일 것이다.
겨울 어느 날 산속에서 추위를 느낄 새도 없이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리산 천황봉에서 벌어진 토벌작전이었다는 것은 뚜렷이 남아 있다. 전투가 한창진행 중이었는데 나의 오른 쪽 다리가 적군의 총을 맞고 유혈이 낭자해졌다. 다리를 의식하자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곧 전세가 기울어진 공비들은 산속 어딘가로 도망가 버렸고 부상당한 나의 육신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정신은 잃지 않았다. 응급처치를 하고난 후 중대장님이 지프차를 불러 산 밑에 있는 의무실로 후송명령을 내렸다. 지프차에는 운전병과 나 이외에 부상병 한명과 우리를 호송하는 한명의 전우가 있었다. 
산길은 눈길이라 험했으면 언제 어느 곳에서 공비를 만날지 모르는 험한 도로였다. 지프차가 내려오면서 심한 커브 길에서 미끄러져 지프차는 전복이 되고 네 명의 전우는 차 밖의 벼랑길로 굴러 떨어졌다. 때는 1월이라서 폭설이 내린 후였는데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차가 벼랑 아래로 굴러 뒤에 앉아있던 나는 눈 위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는지 모른다. 눈을 떠보니 야전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상이군인이 되어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 산속에서 공비들과 전투 중이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른 쪽 다리에 총탄이 관통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리고 차가 전복되었을 때 함께 탄 2명의 전우가 죽었고 2명만 살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만약에 내가 눈길로 떨어지지 않고 바위에 부딪쳤다면 나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죽어간 전우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지며 가슴이 쓰렸다.
나는 병원에서 대통령 수장(제 1322호. 오른 가슴에 다는 훈장)을 받았다. 산속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총탄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전우를 업고 부대로 돌아온 공과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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