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고 있었다.
내 삶이 모자라니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주면 살만 할거라는 꿈, 그래서 소망하고 기도하고  꿈속을 헤메면서도 꿈인줄 모르고 내 말이 내 생각이 옳다고 정당화 시키고자 주장하고 , 설명하고 , 설득하면서, 속 시원한 꼴은 보지 못하고 더 깊은 꿈속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었다. 상대방을 가해자로 본인을 가엾은 피해자로 전락 시키면서….
나에게는 오랫동안 헤메었던 꿈속이 있었다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신체의 다른 부분도 내세울만한 특징도 없고 옷장 문을 열면 만족할만한 옷도 한벌. 제대로 갖추고 살지 못했으며 그런 옷을 고를만한 가격대와 몸매가 유지되어 주지도 않았고 그러기에 내 맘에 딱 맞아 떨어지는 옷을 구매하기가 쉽지 않았다. 집안일 하고 부엌싱크대 앞에 서면 그런일하기에 잘 어울리는 내 모습을 보았고 머리는 오래전부터 탈모로 인하여 샤워를 하고난 그 다음날만 되면 머리밑이 보이고 볼륨없는 폼세는 참 초라해보이기 까지 했다. 또 학벌이라고 한다면 경남 마산의 어느 천주교재단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나의 최종학력이다. 눈뜨면서 시작한 하루의 생활중에서 급격히 빠르게 바뀌는 생활구조의 흐름은 마음은 허둥지둥 바빠지고 불안해지며 어디에다 누구에게 물어봐야할지도 모르는 일들이 눈앞에 닥치면 대학을 못가서 습득능력이 느리고 수준에 떨어지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재물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다.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대한 활용보다는 나 보다 많이 갖고 있거나 다른 것을 소유한 남들이 더 내 눈에 들어왔고 비교하고 부러워하다가 난 왜 이렇게 밖에 살지못할까 하다가 누군가 원망대상을 찾게 되고 결국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자기자신을 택하여 후라이팬위에 멸치볶듯이 볶는 일 또한 내가 정해놓은 얄궂은 설정의 놀음에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였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설정, 이렇게 하면 잘 살 수 있을 가라는 망상과 착각 속에서 그렇게 내린 나에 대한 점수는 때로는 평범한 보통사람 이다가도 비교와 열등의 회오리가 불어닥치면 보통이하의 삶이라고 간주하고 재물의 수준은 아! 만족하다! 감사하다! 할때가 거의 없었고, 나 보다 학벌이 뛰어나고 재물이 많아 보이는 사람보다는 나와 비슷해 보이고 그냥 내 눈에 비친 허무맹랑한 판단으로 나 보다 조금 덜 가진 사람과 편하게 지냈던것 같다. 그리하여 항상 뒤쳐진 삶이 이런것이구나 하는 불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꿈길을 걷고 있었다.

이 모두는 설정에서 오는 분별의 이분법이다.
숨막히는 향연의 연속일뿐이다. 그러기에 꿈에서 깨어나야한다 .이런 설정과 기대는 좋다는 것도 만족이 없으며 이또한 분별임을 알수있다. 왜냐하면 그 또한 변하니까, 입으로는 자신의 고통이 이러니 저러니 말은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어도 해결됬다는 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며 유지되겠는가? 모든 것이 설정과 기대로 인한 생각에서 오는 문제가 실제의 어떤일보다 더 큰 문제라는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조금 더 뛰어난 그 무슨 재주를 갖고 있을때는 우월감에 빠져서는 그런 처지를 이용하여 상처를 주고 또 다시 그 상처를 되돌려 받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나만! 이라는 법칙 같은게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보다는 나만 힘들고 , 나만 불쌍하고, 나만 봐달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때, 미움이란 독소를 스스로 마시게 되고 , 그 미움은 뼈를 녹아 내리게 했으며 마음에서 육신으로 반응이 주어졌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병든 마음 때문에 일어난 일인줄 모르고 꿈길을 걷고 있을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나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 작은 키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것 뿐이었고 그건 진실도 아니고 옳고 그름도 아니며 그냥 그럴뿐이라는것을 알게 된것이다. 그 생각에서 어떻게 할 일도 없이 나와버렸다는것이 치유였다. 그 순간은 한 찰나이고 깨달음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모든 시비 , 부유한 삶, 가난함, 학식의 높고 낮음,이 모든일들이 여기에 대입시킬수 있는 일이다. 이 일은 업적이나 노력으로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먼저 체험한 선지식과 만나서 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을때는 보이지 않았던 여유가 보이고 지난날 나의 결핍에 대한 보상을 실행해 나가는 일이 있다. 봄이 오는 소리에 귀가 열리고 코르코스가 땅밑에서 얼굴을 쏘옥 내밀도록 꽃을 가꾸는 일도 할 수 있고 그 꽂을 기르는 마음으로 세 명의 내 아이들을 길러낸 뿌듯함이 있다.
매년 4월이 되면 고사리를 따다 말려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식구들이 먹고싶은 음식 장만하여 쉼없이 먹고 즐긴 시간도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다. 이번주에는 정월 그믐에 담근 장을 뜨고 된장도 만들어 놓으니 부자된 기분이고 이런일을 할 수 있는 나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세상에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나, 그 부족함을 방어하기위하여 내세우기 위해서 사는 삶도 전부는 아닐것이다 . 부러워 하고 내세우려고만 하기 보다는 내가 할수있는 일이라면 빈 곳을 메꾸어 나가는 일은 어떨까? 코비드 19인한 펜데믹 시기인 요즘 같은 때는 자신의 내실을 기하는 좋은 시기이기도 한것 같다. 난 틈 나는데로 필요한 영상이 있으면 보게도 되지만 지면으로 된 활자, 즉,신문이나 책을 많이 보는 편이며  스마트 폰 시대에 편리함도 있지만 이들을 이용하여 정신적 ,물질적 ,향상을 일구어내야지 이들에게 붙들여 노예가 되지는 않아야겠다는 나의 삶의 지침이기도하다. 또한 활자가 영상보다는 시력을 덜 피곤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없는것 모자라는 것을 불평하고 원망할일만은 아니고 , 오늘 지금부터 내가 할수 있는 일을 시작하면 분명 결과는 있게 되어 있다. 평상시에 하던 일이라도 조금의 의미를 달리한다면 또 다른 결과가 주어질수 있다.

이런 변화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 삶의 혁명 이고 이미 채워져 있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즐길수 있다 .그런일들 중에 이젠 학벌에 대한 비교와 열등의식은 내 삶에 문제가 되지않고 오히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자체에 감사한 마음이다. 재물에 대한 일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없기에 더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져가고 다만 절약하여 사는건 조그마한 여유라도 있으면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또 보이는것이 있다. 이런 저런 분별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다. 또한 상대에게 바라는일이 채워지지 않을때,미움과 불안과 외로움이 친구하자고 찾아올때도,비판하고 강요하는 일보다는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일(고마워,미안해)을 내가 먼저 할수있다면 바라고만 있을때 보다는 훨씬마음이 가벼워지고 여유와 자유로움을 느낄수 있고 옳고 ,그름, 누가 먼저 ,나중,을 가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진실은 마음의 소리이고 마음이 가는데로 따라서 살아도 걸림이 없다. 꿈은 깨어나면 그만이다 .우리가 실제로 악몽을 꾸었을때, 깨고나서 얼마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가? 깨고나면 실제로 “거리두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맨 먼저이고, 어느한 곳에 치우침없이 살아갈수있게 된다. “거리두기”는 냉정해지는것이 아니고”초연”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