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바스 예술박물관(Bass Museum of Art)으로 향했다.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잘 몰라 키 크고 머리 노란 백인 남자 가이드에게 물었다. 다음 역에서 내리란다. 오늘 아침 집에서 마누라와 싸웠는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 내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래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고객과의 대화 시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한다. 은행 다니면서 평생 배우고 가르쳤던 내용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오만하고 불친절한 행동 때문에 기분도 망가졌지만, 목적지도 종내 보이지 않는다. 여섯 블록을 걸어 올라가니 그제야 이정표가 보인다. 그런데 바로 앞에 빅버스 정류장이 있다. ‘다음’이란 말을 두고 해석이 달랐던 모양이다. 주행 중의 버스에서 가이드는 곧바로 정차하는 역(12번 역)의 ‘다음 역’이라 생각했고, 나는 그 이미 지나온 역(11번 역)의 ‘다음 역’으로 알아들었다. 그럴 경우에는 ‘이번 정거장 다음 역(next from this station)’이라고 안내를 해 주었어야지. 확인하고 성급히 내린 덕택에 습기 차고 무더운 오후를 온통 짜증으로 채웠다.
그러나 ‘바스’에 들어서는 순간, ‘할리 베리’ 닮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인이 데스크에서 나를 반긴다. 사람들은 해변으로 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수영하고 선탠하고, 뭐 이런 것들에만 관심 있지 예술품에는 별 관심 없는 듯. 전시장이 썰렁하다. 게다가 무료가 아니고 $10을 받는다. 캐나다 돈으로 환산하니 $13.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할리 베리’는 시니어 입장료가 $5이란다. 아내는 아직 시니어 연령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시니어 요금을 적용해 주겠단다.

바스 예술박물관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이민자인 유대인 존 바스가 설립했다. 푸에르토리코의 설탕공장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은 그는 화가이면서 작곡가로서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1963년까지 그림, 조각품, 섬유예술품 등 500여 점의 순수문화예술작품을 사 모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1964년 그의 성을 따서 바스예술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원래 예술박물관 자리는 1930년에 세워진 존 콜린스 추모 도서관 및 예술센터였는데, 마이애미시가 바스 부부의 다량의 예술품 기증 의사를 받아들여 현재의 ‘바스’가 탄생한 것이다. 돈 벌어 그런데 쓰면 부인의 견제가 심할 터인데 아내인 요한나 바스도 함께 예술품수집을 거들었다. 부부가 함께 같은 취미를 가지고 활동한다면 후손에게 길이 남을 유산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돈 벌면 값진 보석이나 사치품을 주렁주렁 몸에 걸고, 없는 사람들에게 갑질이나 해 대는 어떤 사모님에 비하면 요한나의 내조가 너무 아름답다.
각종 전시물은 독특한 테마를 가지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2018년 1월에는 ‘도시의 사람들’이라는 전시회가 2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사람들을 모두 피에로 인형으로 표현하였다. 도심의 피곤한 생활에 지쳐 힘없이 앉아있거나 혹은 누워 있는 남녀노소 피에로는 현대 도시인의 힘겨운 삶을 극명하게 표현하였다.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 올려진 피에로가 아닌가. 무례해서 밉거나 제 자랑만 늘어놓아 싫은 사람들을 만나도 겉으로는 웃는 척하는 피에로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런 삶이 얼마나 피곤하기에 연극이 끝난 후 저처럼 축 늘어져 있는가. 나도 그들 중 하나에 끼어 공감해 보았다.
마이애미 빅버스의 블루라인 노선은 사실 해변을 빼고는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물론 시간이 많다면 유명 관광지가 아닌 곳을 두루두루 돌아보며 보통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재미있을 터. 그러나 제한된 시간에는 오래 추억에 남을 한두 곳을 선택해서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 부부의 여행방식. 다음 행선지로 빅버스 20 번역의 유대인 학살 추모비(Holocaust Memorial)를 가 보기로 했다.
버스정거장에서 내리니 한눈에 작은 인공 못이 보인다. 중심에 원형의 구조물이 있고, 그 위로 손이 하나 불쑥 나와 있다. 밤에 보았으면 섬뜩할 뻔했다. 온몸이 수렁에 빠져든 사람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려달라며 손을 치올린 듯하다. 2차대전 중 나치에 학살된 6백만 명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가스실에서 처형당하며 고통에 몸부림쳤을 남녀노소. 끔찍한 비극이 미치광이 독재자 히틀러 한 사람으로 비롯되었으니, 개인의 광기가 타인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놓는 역사가 몸서리쳐진다. 현재진행형인 역사는 아직도 주변에서 흐른다. 이복형을 독살하고 고모부를 200발의 박격포로 쏘아 죽인 어느 독재자를 국내외 불문하고 ‘괜찮은 사람’, ‘명예로운 사람’으로 포장하는 무심한 자들을 보면 더 그렇다.

추모비 내부로 들어가니 멀리서 보이지 않던 청동 손목에 다닥다닥 수많은 인간상이 조각되어 있다. 청동 손은 생지옥인 아우슈비츠에서 천국을 향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130명의  유대인들은 모두 부모, 형제, 자매가 함께 한 가족들이다. 최후의 순간을 맞으면서도 어린 자식을 희망의 천국으로 올려보내기 위해 뼈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역시 앙상한 사내아이를 번쩍 치켜드는 모습이 내 눈시울을 붉힌다.
너덧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고만한 나이. 내 아들을 교회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다. 본당에서는 10여 분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또래들이 있는 유치부에 맡겼는데 예배 후 아들이 사라진 것이다. 유치부 선생님은 엄마한테 간다고 나갔단다. 아내와 나는 거의 반쯤 미쳐서 교회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혹시 혼자 걸어서 집에 갔을까 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다. 열쇠가 없으니 집 앞 놀이터에서 놀겠지 했으나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런 귀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 죽어간 것이다. 옆에서 지쳐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중에 교회 식당에서 다른 유치부 선생님과 함께 간식을 먹는 아이를 찾았을 때 주책없이 눈물이 나왔다. 장성해서 일가를 이루고 손자를 보았을 때 비로소 한 숨 돌렸지만, 아내에게는 아직도 30대의 아들은 철부지이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역사는 되풀이된다. 후세인, 카다피, 차우셰스쿠—절대 변하지 않는 독재자의 가면 쓴 얼굴을 받아들일 때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막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성인들의 저항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외면할 때 이미 늦는다. 비단 국가뿐 아니다. 사소한 개인 모임이나 기업이나 사회 비영리단체 등에서도 독재자는 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가 ‘나락에 떨어지는’ 길이다. 새삼 주변을 돌아봐야겠다.
야자나무 가로수에 황혼이 깃든다. 내일은 카리브해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틀간의 주마간산이었지만 벌써 마이애미가 정답다.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더스틴 호프만이 왜 죽기 전에 와 보고 싶었던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문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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