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요즘은 코를‘톡’쏘는 맵싸한 와사비의 향기에 젖어 산다. 손에 익지 않은 일이라 아직은 어설프지만, 고추냉이처럼 매운 일상이 그래도 감사하다. 온 가족이 하나 되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보면, 머지않아 뎀뿌라, 테리야끼 소스처럼 일상이 달큰해질 날이 오리라 기대해 본다.
참으로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의 이민수기와도 같은 장황한 글을 퇴고를 거듭하며 요약한 수필, [날마다 도전하는 삶]은 나의 적나라한 민낯을 그대로 세상에 내보이는 듯해서 부끄러워 망설였던 나의 솔직한 인생 고백이다.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묵은 짐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화선지 한 장. 펼쳐보니 그 위에는“날마다 도전하는 삶을 살자”라는 가지런한 판본체의 한글 붓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2008년 추석에 가산’이라는 어느 서예가가 토론토의 한인 행사 때 써준 것이 기억났다. 가훈 내지는 쓰고 싶은 짧은 내용을 말하면 한 장 한 장 정갈한 붓글씨체로 써주셨는데,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써달라 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즉흥적으로 주문한 내용이었지만, 어쩌면 내 평생 마음에 아로새긴 좌우명이었다. 스스로 묵시적으로 되새김질하며 나태해질 적마다 내리치는 채찍과도 같은 글귀였다.
1990년 12월 1일, 22살의 나이에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어학 연수차 유학을 왔다. 친척분들이 계셨지만, 이역만리 낯선 땅에 온 것부터가 내게는 크나큰 도전의 시작이었다. 3개월 만에 방을 얻어 작은 이모님 댁에서 독립하여 홀로서기를 했다. 6개월 일정의 어학연수 학교에 다니며 자취방 근처의 한식당에서 밤늦도록 아르바이트를 했다. 새벽까지 일한 날은 다음날 학교에서 쏟아지는 잠과 사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나름 하루하루를 역동적으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던 시절이었다.
6개월 후, 이제 겨우 영어로 입을 떼는 수준의 실력이었지만, 나는 또 한 번의 도전을 감행했다. 죠지 브라운 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 강의를 등록했다. 내 실력으로 강의를 어떻게 알아들을지 잔뜩 겁을 먹고 등록을 주저했었다. 그때 토론토 대학에 다니는 한 유학생 친구가 자신도 처음에는 교수의 강의 내용을 다 못 알아들어 녹음해서 듣고 또 듣고 반복해서 공부하다 보니 귀가 뜨이더라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대학 공부와 식당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한국 집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나는 경제적으로도 홀로 자립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두근두근 대는 가슴으로 강의실에서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우며 강의를 소화해 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1992년 1년 만에 전 과정을 수료하였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혈혈단신, 유학생의 신분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이 따랐다. 대학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 일하던 식당에서 내성적이지만 무척이나 성실하고 착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서른 즈음 꽉 찬 결혼 적령기였고, 나와 처음 데이트하는 자리에서 의외로 결혼하고 싶다고 당차게 고백하던 사람이었다. 5개월 남짓 연애를 하며, 나는 알 수 없는 나의 미래를 두고 갈등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냐, 운명 같은 이 남자와 결혼할 것이냐……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던 도전의식은 날 토론토 땅에 주저앉혔다. 그렇게 캐나다 이민 생활이 결혼과 함께 새롭게 시작되었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실로 롤러코스터와 같은 힘겨운 결혼 생활을 했다. 첫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무렵, 1년여 회계사 사무실에서 일을 배웠다. 그러나 곧 원하던 둘째 딸아이를 임신해 심한 입덧으로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2000년 이후로 출산과 육아에 전념하며 지내다 몇 군데 일을 시작했고, 드디어 적성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직장을 찾게 되었다.
2004년 11월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바쁜 ㅇ마트의 장난감 부서에 비정규직 직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내일 같이 책임감을 느끼고 극성스럽게 열심히 일한 탓에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6개월 만에 정규직 직원이 되었다. 패션 프로세서로 2년간 일하다 패션 부서장으로 승진했고, 이후 수년간 여러 부서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2년여 살았던 밴쿠버로 2009년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부메랑처럼 불현듯 돌아왔다. 토론토 전 스토어 매니저의 강력한 편지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놀스 밴쿠버 ㅇ마트에서는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나를 부서장도 정규직 직원도 아닌 비정규직 직원으로 인사발령을 냈고, 나의 도전은 또다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홈 부분의 정규직 부서장으로 지원하여 승진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부서장의 몫을 차질없이 혼자서 거뜬히 해내며 차차 인정받고 정착해나갔다. 이후, 부서를 옮겨와 패션 부서에서 오랫동안 담당 매니저를 도와 일했다. 6년 만인 2015년, 스토어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거듭 승진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과 어떤 이는 영전했다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스토어 어시스턴트 매니저는 스토어 매니저 바로 밑의 직책으로 몇몇이 대략 350여 명의 전 직원과 스토어 전체의 운영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다. 같이 일했던 부서장급 동료 중에는 언어에 아무런 제약이 없고 경력이 오래된 현지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편안한 울타리에 안주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새롭게 도전하는 용기 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왜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일을 자원하냐? ”고 반문했었다.
옛말에“모르면 용감하다!”고 겁 없이 짧은 이민자의 영어로 나는 한 계단씩 도전했다. 몇 명의 지원자 중 여러 차례의 인터뷰를 거쳐 당당히 혼자 승진하여 ㅇ마트 리테일 아카데미의 경영자 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새 스토어의 영업을 위해 직원들 채용을 도왔고, 패션 담당 부서 직원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스토어 인수 이후, 실내 공사가 여전히 진행되는 동안에도 스토어 부서별로 매장 개점을 위해 전 직원이 분주하게 일했다. 낯선 장비를 설치하고 인벤토리를 채우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열정을 쏟아부었었다. 한 달 만에 그랜드 오프닝이 차질없이 진행되었고, 매장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갈 1년여 즈음 여러 가지로 무리한 탓에 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일단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게다가 밤낮없이 계속되는 오버타임과 쉬는 날, 휴가중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적체된 과중한 업무량이 당연히 무리하게 요구되는 것이 날 지치게 했다. 그 외에도 몇몇 담당 부서 직원들의 성실하지 않은 방만한 근무태도, 그들 사이의 알력 등에서 기인한 스트레스성 건강 이상으로 급기야 13년 만에 퇴사를 결단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 ‘테니스 엘보’라는 양쪽 팔꿈치 염증, 목과 어깨에 엄청난 통증을 유발하던 오십견과 만성 비염, 족저근막염의 만성 통증으로 걸을 수 없어 주사까지 맞으며 일해야 했던 날들. 영육 간에 피폐해져 참으로 심란한 2017년 한 해를 보냈다. 지금은 여러 방면의 치료 후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나의 도전적인 삶의 선택에 대한 후회는 결코 없다. 치열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았고, 내게는 필요했던 인생 여정의 쉼표라 생각한다.
“실패도 노력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훈장”이라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었다. 어쩜 그리도 가슴이 아리는 위로의 글귀이던지. 실패했다고 절망하거나 주저앉을 이유가 없는 건 그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일생의 굳건한 신조로 삼았던 메시지가 있다.   “썰물이 있으면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온다.” 인생의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는 법이다. 이 메시지는 나의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을 곰삭이며, 인내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다. ‘언젠가는 나의 밀물 때가 오리라,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 ‘
그간의 27년간 이민 생활을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절로 실감 난다. 지난해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맞은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아들딸이 장성해 가는 것과 나날이 늘어가는 세월의 모진 흔적 앞에 서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온다.
내 나이 이제 곧 반백 살이다. 2018년 2월, 작은 규모이지만, 드디어 남편의 숙원인 식당 개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요사이는 또다시 도전하는 삶으로 점철될 우리 부부의 인생 제2막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이제는 중년인 우리 부부의 건강염려와 이런저런 걱정들이 태산처럼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걱정을 멈추는 길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임을 상기하며, 심호흡을 깊게 한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두렵고 떨린다. 그러나 꿈을 접은 채 움츠리는 삶보다는 더 늦기 전에 힘차게 퍼덕이며 날갯짓하는 삶을 택하련다. 머지않은 미래에 창공을 박차고 눈부시게 비상하기 위하여. 그래도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글쓴이 | 김혜진
문예 창작 대학 10기 수료. 캐나다 한국 문인 협회 회원. George Brown College, Hospitality Management 수료. Walmart Canada 13년 근무, Assistant Manager로 퇴사. 현재 가족 사업으로 일식당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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