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로 가는 합승차안에서 우린 지나온 우리들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랬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자 고향이 경상 창원인 분이 아니 같은 세대 아니 비슷한 세대인데 그렇게 다를수가 있냐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을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요즘은 모든 가전 제품이 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캐나다에선 냉장고도 오븐도 아니 히팅도 전기로 하는 곳이 많다.
전기는 당연히 들어오는 것이고 전기가 없는 세상은 상상 조차 해 보지 않은 것이다. 전기자동차까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가는 요즘 같은 세상에 전기가 없는 세상이라니 지금 뭔소리 하는거냐고 하실 분도 계실것이다. 그랬다. 호롱불 아래 서 공부를 해 본 사람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의 속담을 그 뜻만 기억할지 모르나 난 그 뜻보단 그 말이 가진 원래의 뜻 그 러니까 등잔 밑은 정말 어둡다는 그 진리를 몸소 체험했다.
호롱불의기름을 아끼기위해 아버진 늘 숙제는 낮에 해가 있을 때 하길 원하셨다. 더불어낮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소를 외양간에서 풀이 많은 들판이나 산에 데리고 가서 메어놓고 풀을 뜯어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소꼴(풀)을 베기 위해 지게를 지면 언덕배기 내리막 길엔 지게가 땅에 질질 끌리고 지게와 함께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는 말도 않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호롱불을 들고 다니면 불이 꺼지니 남포등에 남포불을 켜고 나가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기름을 아껴야하기 때문에 달빛이 있는 날은 달빛에 의지해서 별빛이 있는 날은 별빛에 의지해서 밤을 지내야했다. 물론 별빛도 달빛도 없는 그뭄 날 밤은 그야말로 칠흙같이 어두운 밤. 해 가지고 나면 일찍 잘 수 밖에 없었다.
라디오도 TV도 없는 컴퓨터는 더 더욱 없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땐 70년대초였다. 하지만 바다가 없는 시골인 제천 산골 마을엔 문명하고는 거리가 먼 세상이었다. 아니 문명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생선과도 거리가 멀었으니 생선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이 소금에 절인 고등어가 가장 많이 생각이 난다.
물론 동태도 겨울엔 사 먹기도 했지만 소금에 절인 고등어 괴짝은 제천시내 시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배추를 팔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제천역 전시장에 자주 간 탓이다. 한 접(그러니까 100포기)를 리어커에 가득 싣고 모란다리를 넘을 때부터 뒤로 밀리거나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배추가 나를 들어 올려 리어커 앞 운전대(?)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오르막을 오를 땐 뒤에서 밀고 있는 어머니가 행여라도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이 달려 뒤로 주춤주춤 밀리면 안간힘을 써서 올라갔다.
배추를 팔기 위해 초겨울까지 시장에 가는 일이 있었는데 추운 시장 한켠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일도 일이지만 손님이 배추를 사고 제천역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사는 관사까지 가려면 오르막을 오르는 일이 더욱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배추를 리어커에 실어주는 것은 아버지가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된 상술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안쪽에 보이지 않는 곳엔 작은 배추로 채우고 위에 보이는 부분엔 통이 좋은 놈으로 실었다.
그렇지만 배달을 가서 배추를 내리면 금방 아버지의 눈속임은 드러나고 말았고 나와 어머니는 손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반복해야했다. 하지만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말해도 다음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다.
당연히 밭이나 돌담 위에 자란 풋호박과 풋고추 등이 주반찬일 수 밖에 없었고 된장 간장 고추장이 주요 반찬일 수 밖에 없었다. 불을 피워서 밥을 하는 부엌이니 재가 날아서 찬장에 둔 그릇까지 늘 재를 뒤집어 쓰기 일쑤였고 겨울엔 불을 피우고 아궁이의 불을 꺼내 화로에 담아 화롯불에 찌개를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해서 밥과 찌개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하는 시절이었다.
밥엔 쌀을 늘려 먹기위해 늘 감자를 올려찌거나 보리쌀을 삶아 놓았다가 섞어서 먹거나 했는데 때론 쌀이 떨어져서 나물이 많이 들어간 나물밥을 먹기도 하고 나물죽을 먹기도 했다.
그러니 학교에 가도 늘 배가 고팠다.
집에서 먹는게 부실한데다 간식이라고는 전혀 못하다 보니 늘 허기가 졌다. 학교 앞에 문방구에서 파는 또뽑기 등은 늘 불량식품이었지만 인기가 좋은 것들이었다. 쫀드리를 아주 많이 먹어봤으면 하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밥 위에 계란후라이를 올려오는 아이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렇게 간식이 고픈 아이는 가끔씩 들리는 엿장수가 오면 아버지의 안 쓰는 흰고무신이나 양은 냄비뚜껑을 가져다주고 엿을 바꾸어먹고는 했는데 그것도 없으면 엿장수가 고물을 가지러 다른 집에 들어간 사이에 엿판에 있던 깨를 입혀 살살 녹는 깨엿을 몇개훔쳐서 달아나 언덕에 올라가서 먹곤 했다.
아버지가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시키면 먼지 쌓인 나무 선반 위에 진열된 자야와 라면땅 같은 과자에서 눈을 땔 수 없었으니 그 아쉬운 마음을 걸을때마다 줄줄 넘쳐 흐르는 막걸리를 마시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전기만 없는 게 아니었으니 수도는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던 시골소년은 두레박이 모두가 마시는 물이라고 생각했다. 케찹깡통 같은 곳에 나무걸이를 걸고 줄을 매서 우물에 던져 물을 담아길어 올리면 누이는 항아리 물동이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아침마다 마을 앞 개울에서 세수를 했다.
물론 추운겨울엔 가마솥에 끓인 물과 찬물을 섞어 세수를 했고 잘해야 한달에 한번 고무함지에 물을 데워서 어머니가 목욕을 시켜주셨다. 화장실이라고 하지 않고 변소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는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변소는 안채에서 많이 떨어져있었던 외양간이 있는 행랑채였는데 겨울이면 요강에 볼일을 보기도 했지만 커지면서 방안에서 볼일을 본다는게 여간 불편하지않아서 달빛을 등불 삼아 변소를 가곤 했다.
겨울이면 변소에 변과 소변이 얼어서 고드름처럼 올라왔으니 자리를 옮겨가며 앉아야했는데 깔판조차 얼어서 미끄러워 미끌어지기도 했다. 사고는 여름날에 있었으니 그날은 그뭄날 밤 달빛도 별빛도 없어 변소에서 더듬더듬 자리를 잡고 앉아 볼 일을 볼고하다가 그만 한쪽다리가 빠지고 말았으니 그 향기로운 냄새보다도 더욱날 괴롭힌 것은 똥통에 빠진 놈이라는 것이었다. 화장지는 당연히 구경을 해본 적이 없었고 신문도 구경조차 못해 본 우리집에서 화장지로 쓸 수 있는 것은 나의 지나간 공책과 책들이었다.
한장을 뜯어 보드라워질때까지 문질러서 볼일을 보는 그런 시절도 있었다. 산에 나무하러 가서 급하면 가랑잎으로 볼일을 봤으니 그 까칠한 느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에 전기가 들어왔다. 불을 켜니 백열전구가 달빛보다도 몇 배 환했다. 새카만 소켓토에 백열전구를 끼우면 안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필라멘트인 것을 안 건 아주 뒤에 일이다. 전기가 안 들어왔으니 당연히 집엔 가전제품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전기가 들어오면서 우린 라디오를 샀는데 라디오를 아무도 껼 수 있는 식구가 없었다.

결국 내가 이것저것 돌리다켜지긴 했는데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물론 볼륨이 어디에 붙었는지 어떤게 볼륨인지 아는 건 이것저것만지 다 실수로 알게 된 것들이다. 우리집 엔소가 있었고 우리 동네에 유일한 디딜방아가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디딜방에 별로 찣을 것이 없었던 것은 우리가 짓는 농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에는 늘 달걀을 낳아주는 닭이 있었다.
따근할때 훔쳐먹는 달걀맛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는데 지금처럼 사료를 주어 기른 닭이 아니고 말 그대로 유기농 달걀이었기 때문이리라. 외양간 뒤편에 심어 놓은 당근은 학교 갔다올때마다 하나씩 뽑아먹는 나의 간식이었는데 그 당근의 향을 지금도 잊지못한다. 당시엔 어려운 형편때문에 먹지못하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너무도 흔한 세상.
마켓에 가면 사시사철 딸기가 나오고 포도가 나온다. 수박이 나오고 참외가 나오고 심지어 파인애플 바나나가 늘 곁에있어 먹고 싶은 마음과 돈만 있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동네 큰일이 있어야만 돼지를 잡아서 몇 근을 먹을 수 있었고 생선이라곤 고등어 절임만 있던 그때 여름에 장마지고 개울물이 어느 정도 있으면 집에 쓰던 챗바퀴를 들고나가서 물고기를 잡고는 했는데 언감생심 붕어가 있을리 만무했고 중터리 종류의 잡고기를 잡아다가 푹 끓여 뼈를 발라 내고 된장 풀고 추어탕을 끓여먹기도 했다.
물론 농사가 끊나고 논에 미꾸라지를 잡아 진짜 추어탕을 끓이는 일은 아버지들의 또 다른 재미였고 얘기를 듣고 있던 분이 우린 경상도 창원이라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신다. 나의 아내 또한 서울출신이라 내가 그렇게 자랐다고하면 도저히 믿기지않는다고 말한다.
그 당시 우리 서울엔 라디오는 물론이고 전축이며 나중에 텔레비전 등도 다 있었노라고 미개인처럼 처다본다. 초등학교 때 가방에 프라스틱 컵을 매달고 다녔는데 학교 뒷마당에 큰솥을 걸고 분유를 끓여서 한컵씩 마시고 빵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이스께끼도 소풍날 누나가 사서 주는 걸 먹고 이런 환상의 세계가 있구나 싶었고 사이다 한병을 다 마시고 술 취한 것처럼 취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변화가 많은 시대에 살던 우린 군사정권이 강요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않는다는 선생님의 강요에 죽을 힘을 다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구구단을 외웠다.
지금의 학교에선 선생님이 학생들을 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바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고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 때만 해도 남자선생님이 더 많아 좀 더 엄했고 지금은 여선생님이 많아서 그런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아이들은 너무 자유분방해졌는데 아이들끼리의 차별과 괴롭힘은 더 심해진것 같다.
잘 먹는다고해도 계란후라이 밥위에 얻어오는 아이가 있는 정도이고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온 학생이 있는 정도의 차이였던 그 시절엔 집에 가전제품있는 사람손 들어봐하면 아무도 손드는 아이가 없었다.
다같이 못살던 그땐 동네에 한집이 텔레비젼을 사면 온동네 아이들이 그집에 떼로 몰려가서 흙먼지를 방바닥에 뿌리면서저녁 10시가 넘어서까지 전우에 나오는 라시찬과 숲속에서 아아아를 힘차게 외치던 타잔을 즐겨보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유명브랜드가 아니면 신지않으려는 아이들이 많은 시절이 아니라는 얘기다. 브랜드 있는 명품을 입지않으면 차별받고 브랜드명품을 입고 온 아이들의 신발을 뺏어신는 일진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은 일제불매운동을 하는데 이 아이들의 일진은 왜 없어지기 않는지 이 기회에 일진이라는 단어까지 없앴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