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일상 중>
사람이 재산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요즈음은 참으로 감사한 삶을 보내고 있다.
길지 않은 시간을 홈스테이 엄마로 살아오며 상대방에 대하여 실망과 후회가 많았던 시간을 보내온 게 사실이었다. 많은 이들은 기쁜 일이 있을 때보다 슬픈 일이 있을 때 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며칠 전 겪었던 슬프고 당황된 일에 내 아이들과 소중한 지인들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힘들었을지 모를 그 시간을 떠 올려 본다.
며칠 전, 친정아버지의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어찌할바를 모르며 발만 동동거렸던 나는 그 상황이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날이 있다. 집안의 애경사에 우리 부부가 함께 참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생활을 하고 있는터라…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아버지와의 이별 준비를 홀로 해야 한다는 쓸쓸함은 어느 때 보다도 큰 갈등이 되었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던 시간에 지인에게 전화가 왔고, 사정을 이야기하는 중에 건네오는 말은…
‘이 곳은 우리 어른들이 알아서 잘 돌보고 있을 테니, 남편과 함께 다녀오라’는 말씀이었다.
홈스테이의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있다고 돌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너무 잘 알기에 머뭇거렸지만, 동생 같은 내가 온전히 염려되어 주신 말씀임을 잘 알기에 염치없게도 받아들이며 한국을 오게 되었다. 인천 공항에 착륙하자마다 확인이 된 아버지의 소천 소식은…이렇게 소중한 분들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장례조차도 제때에 할 수 없었을 지 모르는 불효녀가 될 수 있었던 상황을 면하게 하였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4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흘렀고, 캐나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볼 여유가 있었을때, 나는 한번 더 내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눈물이 흘렀다. 대학생인우리 집 코디네이터들은 각자가 요리를 만들기도 하였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등의 사진으로 내게 일일이 소식을 전해 놓았으며 잘 지내고 있으니 할아버지 잘 보내드리라는 기특한 말들에……,8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 어른들의 시장 봐주기와 간식 등을 갖다 주시는 수고에도 고개는 숙여지고,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스러움이 얼마나 값진것인지 감사하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은 그래도 참 괜찮게 살아왔다는 뿌듯함이 내 진심이다. 한국에서의 3일도 그러하였다.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들 부모님과 친구들, 밴쿠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의 지인들, 모든 분들이 한 걸음에 달려와 함께 슬픔을 나누는 따뜻함은 지난 시절 평범하지 않았던 생활이 가치있는 삶이었다는 생각에 흐뭇함도 느끼게 되었다.
솔직히, 후회가 많은 8년이었다. 나도 대부분의 유학생 부모처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던 기억도 있었고, 가족만이 누릴 수 있는 평온함이나 자유함이 많이 그리웠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아이들을 위해 희생인 줄 알았던 지난 시간들이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데…나와 가족을 지탱해 주었던 매개체였음을 반성하여 본다. 되돌아보면 아이들에게 내가 주었던 손길이나 마음보다도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사랑이 더 큰 것임을 속 좁은 나는 미리 알지 못 하였다. 그렇게 핑계처럼 억울해하던 시간은 주변 사람들의 위안과 기도로 보호 받고 있었다는 현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이렇듯, 부족한 것 투성이인 나는 아이들과 내 사람들을 통하여 얻은 따뜻함과 함께 하는 동질감으로 앞으로 살아가며 만나게 될 또 다른 인연들에게 고스란히 갚아야 할 빚인 것이다. 이제는 좀 더 성숙해진 아이들의 어미이자 이모여야 하는 이유도 받은 많은 것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훗날,우리 아이들의 기억속에 나는, 너그러움과 따뜻함으로 남아있길 바라며 마침표를 찍어보려 한다.
<두 번째 일상 중>
지난 소식에 우리 집 두 아이의 인터뷰를 거론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의젓한 기다림은 좋은 소식으로 돌아왔고, 학업과는 별개로 사회인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도전이 된 것이다. 많은 캐네디언 젊은이들은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생활하고 있다. 대한 민국의 많은 부모님들이 속 마음은 부러울지 모르나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삶보다는 학업에 열중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어가길 바라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는다.오랜 시간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직접 겪지 않은 부모님들은 내 아이의 성향과 학업 기본 능력 또는 사회성을 자세히 알지는 못 한다. 가깝다고 여겨졌던 혈육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좋아하고 집착하는지와 장단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느낄 때마다 많이 조심스러운 것이 내 입장이다. 두 ,세가지를 병행하는 활동이 가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 비하여 한 가지의 활동도 겨우 해 내는 에너지를 가진 조카 아이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이끌어 가야 하는지는 가족을 만날 때마다 답답해지는 일이 생기기에 어려운 관계인 것이다. 처음 시작하던 시절에 주변 사람들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귀뜸하며 길지 않은 인연을 맺으라고 권유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는 그들의 말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열심으로 살았던 내 삶의 방향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고집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다. 거기에는 내 아이들이 어른이 될 것이라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오류가 있었다.어린 시절 말 잘 듣고 계획을 따라오던 숙녀는 어느 사이 자라서 자신만의 고집이 생겼고,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어른이 된 것이다.
함께 살아온 나도 짐작 못 했던 아이들의 모든 것을 낳아 주신 부모님들이 기억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고 중간 역할자인 아이들의 말 한마디,숨 소리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부모님들 생각도 외국에서 자라고 학업을 이어가는 아이들의 삶이 한국에서 성장하여 준비하는 젊은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것을 받아들 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각자의 계획과 에너지에 맞게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인정하여 주는 것이 가장 값진 부모님들의 서포트임을 알아 주기를 바라여 본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다만,아이들을 돌보며 그들의 멘토가 되어 주는 귀한 자리에 있음을 항시 기억하려 노력할 뿐이다. 이들이 가는 길이 가시밭 길이 되지 않기를 오늘도 소망하여 본다.

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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