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함으로써 말을 하게 되고 말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생각과 말로써 표현되고 이어지는 대부분이 걱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예 걱정이 습관이 되고 생활화 되어서  당연하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사는데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면서 반영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때로는 꿈이라는 이름하에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그 생각에 후회하고 절망하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살때도 있다. 오로지 삶의 근거를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것이라고 예견하여 이 방법 저 방법 생각 바꾸기 노력을 하자는 방법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어떤  생각이란 것을 제어하고 고르게 맘에 드는 생각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은 물속에서 좋은 물 진짜 물을 구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냥 물은 이 모양 저 모양의 물결로 때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보일 뿐인데 거기다 벗어나야 된다고 하고 때로는 이런 저런 이름을 붙인다는 자체가 걱정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러나 한순간 뭔가 내가 손을 쓴다고 뭘하고 있다고 하는데에 잠시의 위로는 가능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항상 지속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볼수 없었다. 그럼에도 현재의 지금의 생각과 처지에 만족할 수 없기에 항상 뭔가 해결되면 이 처지가 아니면 행복하고 편안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아쉬움으로 하루 해를 채우고 있을 때가 많다 .

나의 신앙생활에서의 구원에 대한 맹목적인 바람도 뭔가 내가 바라는것이 이루어지면 구원이 이루어질거라고 그것도 죽은 후에 말이다. 지금 생각이 걱정으로 치닫고 있고 그걸로 맘이 편치 않은데 죽어서 구원받아 천국에서 사는 것이 가당키나 한일인가 말이다. 항상 좋은 생각으로 일관되어 걱정이 없고 그 곳이 천국이라면 항상 좋게만 느껴지겠는가? 그런 사람은 환자이지 정상인은 아니다 . 매일 좋은 일만 계속된다면….그럼에도 난 그것을 모르고 그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몸부림치고 살아왔다.

그렇다면 생각이 걱정으로 우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관계는 두 사람 이상 만나다는 것이고 그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를 알리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하면서, 또는 어떤일을 통하여 또 어떤이는 말을 하지 않고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여기서는 누가 좋은 방법이고 누가 옳고 그른지를 평가 할 수 없음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다를때는 아주 쉽게  단칼에 비방하고 흉보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왜? 내가 상대보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이것이말로 걱정으로 치닫는 원인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황이다.즉 특별한 사람의 행보는 비교하고 계산하고 자기가 가진것보다 없는 것에 취중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자신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가장 특별한 것은 가장 평범한 것이라고 했다. 그건 우선적으로 지금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는가이며 나와 인연 맺고 있는  어떤 처지, 사람들에게 대한 마음 밭의 현주소가 자신에게서 파악이 가능한가 이다. 그건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거나 나쁜 감정이 있으면 안된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 마음 밭의 현주소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볼 수 있고 인정하면서 그 시간이 지나가도록 그냥 두는 마음이다. 그 특별하고 싶은 마음은 채워지지 않은 결핍으로 인하여 시작되었을 수가 있다.

난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 채워지지 않는 허한 맘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써 채우려고 했던것 같다 착한사람, 봉사잘하는 사람, 남에게 뭘 잘 주는 사람 , 고약한 버릇임을 몰랐다. 그런 마음의 반이라도 남편에게 사용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열녀비라도 하사받았을 것이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남편은 울고 있는데 절 모르고 시주한 격이 되었지 뭔가 싶다.

가까운 인연이 무슨 일로 저렇게 내가 싫어하는 길로 목숨걸고 가려고 하는지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미워하고 폭언으로 채찍질하면서 비판으로 몰아세우고 무시하는 일 밖에 할수있는 일이 과연 그것뿐이었으며 그 남편의 그런 습관이 바뀐다고  내가 특별해지고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다고 만족한 삶으로 사랑받고 존경하면서 살아질수 있었겠는가?

걱정은 설정과 기대에서 오는 욕심이다 . 적어도 난 이런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했다는 설정이 내 안에 있었고 내가 그 사람보다는 우월하다는 전재가 깔려 있었기에 그 사람의 장점은 볼 수 없었고 오로지 불평과 비판만이 전부가 되어있었다. 이런 전재하의 삶은 자신의 문제를 들춰내고 인정하는 일을 대단히 꺼려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가까운 사람의 반응보다 남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에 촛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생각이 걱정으로 진행되면서 불안과 공허함이 배수진을 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또 다른 특별해짐의 특성은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특별해지고 싶는 사람의 특징이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특별해지고 싶은 맘 자체가 이미 병의 증상으로 나타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본 모습은 보려고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이고 전적으로 상대방의 문제만 보이는 “Because of You”이며 주위에서도 한몫 거든다 “어떻게 그러고 살아요 당신만큼 잘 참고 사는 사람은 없을거라” 고….
이런 일도 나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함정임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건 또 한번 내가 특별해지고 싶은 맘을 부추기는 일이었음을 모르고 주는데로 달달한 것 핧아 먹었다는 사실.
상대방이 바뀌면 자신은 아무문제 없이 살수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이미 엄청난 특별한 삶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고 욕심도 별로 없다고 말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참 불쌍한 사람들이 있었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맞아죽은 개구리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특별해지고 싶은 맘과 욕심이 한편 먹는다는 것은 꼭 눈에 보이는 최고의 자리 많은 부의 축적만이 아니다
관계 안의 누군가에게 자신이 옳고 그 한사람에게서 이겨먹고 싶고 자신이 원하는 데로 관계가 형성되어 만족하게 살고 싶은 욕망도 특별해지고 싶은  잔유물이라 할 수 있다 .

여기서 우리는 피라밋과 모자익의 관계형성을 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삶에서든지 피라밋의 꼭대기를 갈망하면서도 남의 눈에는 드러나게는 보이지 안으려고 애를 쓴다. 그 꼭대기 갈망은 내가 성취 못했으니 대를 이어 한풀이와 집착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모자익의 한 점이되어 누가 특별하다고 해 주지 않아도 그 가치가 독특하다거나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고도 없으면 확연히 그 존재의 소중함이 인지되는 삶이라면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의 결과물인 걱정의 빈도는 줄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변화이다. 순례라는 것이다.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고 안주하고싶은 마음은 순례를 거부하며 변화를 두려워 한다. 안주하고싶은 인간의 염원은 예로부터 있었지만 과학이 발달하여 편리해지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게을러지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소통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안주의 병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지금 안주하고 있는 이 일을 잃을까? 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과 새로운세계 즉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보는 일, 도전이 무섭고 귀찮게 여겨지기에 안주에 머물고 있다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고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일이기에…

내 마음 살피는 일!
먹고 사는 일 ,좋은 관계유지 , 정신과 육체 건강문제, 모두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큼 중요한 일이다 . 그 중에 우선 순위를 정하라면 마음 스캔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몸에 중병이 나 있음에도 이것 먼저라는 말은 아닐것이다. 이 마음의 스캔은 마음의 현주소를 아는 것이며 병을 자랑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살포시 열어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기회를 만들어 이행하는 일이다. 그리되면 누구를 만나도 내게 못마땅한 남의일 이야기 하지않고 자신의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안에 순례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한사람의 진실이 행동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편해질수 있고 비록 지금 시작은 작고 미약한것 처럼보일지라도 우주의힘이 그 안에 펼쳐지고 있음을 볼수있을것이다. 누구든지 오늘 살아 있다면 오늘이 가장 빠르고 그일 하기에 가장 좋은날이다. 나의 실패를 더듬으며,내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고 바르게 살고 희생하면서 지고 살았다고 해도 상대방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내 생각에서 오는 착각과 걱정일 뿐이고 그것이 나의 정확한 진단서는 아닐것이다.